[Taste/인생의 맛]비빕밥 만들어 꿀맛 즐겨요… 채식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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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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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 잡지인 월간 ‘비건’의 이향재 편집장.
채식주의 잡지인 월간 ‘비건’의 이향재 편집장.
어느 여름날 오후였다. 동요 가사처럼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려 있던’ 날로 기억된다. 앞마당에서 수탉과 암탉, 그리고 병아리 솜털을 벗은 지 얼마 안 된 중닭이 먹이를 쪼고 있었다. 하늘에서 매 한 마리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매는 순식간에 중닭 하나를 낚아챘고 이를 본 할아버지는 싸리 빗자루로 매를 후려쳤다. 매는 사냥에 실패했지만 중닭은 한쪽 다리를 절었다. 그날 저녁 밥상에 중닭으로 만든 닭곰탕이 올라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어린 나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달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릴 적 동네 잔치에 다녀오신 할아버지가 돼지고기 한 덩어리를 신문지에 싸들고 오셨다. 나는 감자, 풋고추와 함께 고추장 양념이 잘 버무려진 고기를 몇 점 먹었다. 그날 밤 머릿속부터 발등까지 두드러기가 올랐다. 할머니는 아궁이 앞에서 발가벗긴 나를 세워놓고 소금을 뿌렸다. 그 이후로 나는 돼지고기 냄새만 맡아도 비위가 상한다.

바다 근처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머니는 멸치 한 마리, 액젓 한 숟갈도 못 먹는다. 비린내가 난다는 이유에서다. 어머니를 닮은 나는 김치는 물론이고 김치찌개도 안 먹는다. 젓갈 냄새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쇠고기는 오랫동안 먹었다. 사람이 자라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백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옳다고 믿어서일까. 아니면 소에게서 상처받은 경험이 없었기 때문일까.

쇠고기마저 먹지 않고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5년 전이었다. 태어난 지 3개월 된 고양이를 키우면서부터다. 무게 520g의 고양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나는 동물 사료부터 공부했다. 공장처럼 운영되는 축산업 관련 책을 읽으며 여기서 얻은 깨달음을 토대로 채식주의자가 됐다. 2011년 2월에는 채식주의 잡지인 ‘비건(Begun)’을 창간했다. 시작했다는 뜻의 비건과 채식주의자인 비건(Vegan)은 발음이 비슷하다.

비건의 기자들은 외식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부분 채식주의자라 회사 근처에 마땅히 갈 식당이 없다. 그 대신 사무실에서 매일 점심을 차려 먹는다. 그러다 보니 기자들의 요리 솜씨가 날로 늘고 있다. 한 기자는 각종 무침에 들어가는 양념을 기가 막히게 잘 만든다. 발효된 매실청을 넣은 초고추장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맛이다. 또 다른 기자가 시금치를 올리브 오일과 비니거(식초) 소스로 살짝 볶아 만든 나물도 일품이다.

내가 제일 잘 만드는 음식은 콩국수와 된장비빔밥이다. 콩국수는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두유에 두부를 듬뿍 넣고 갈아서 국물을 만든다. 된장비빔밥은 된장으로 만든 소스가 중요하다. 된장에 으깬 두부와 다진 청양고추를 듬뿍 넣고 약한 불에서 졸이다 들기름 한 방울을 넣으면 소스가 완성된다. 현미밥 위에 채소를 양껏 썰어 올리고 된장소스 두 스푼을 넣어 비비면 침이 꼴깍 넘어간다.

겨울이 제철인 귤을 갈아 주스를 만들어 먹었더니 거름망에 남은 찌꺼기가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밀가루에 소금, 해바라기씨, 호두 아몬드를 다진 것, 건포도 몇 알 넣고 반죽해 기름을 두르고 부쳤다. 약간 새콤한 씨앗호떡(부산 지역에서 파는 호떡의 일종) 맛이 났다.

채식주의자로 3년간 살아보니 어르신들의 말이 틀린 게 없다는 생각을 한다. 제아무리 비싼 재료로 만든 성찬도, 그럴듯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에서 먹는 코스 요리도 집에서 내가 만들어 먹는 밥보다 못하다.

이향재 월간 ‘비건’ 편집장
#채식#이향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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