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건축이 거는 최면, 느껴본 적 있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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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 펴낸 이상현 교수

① 히틀러 집권기에 건설부 장관을 지낸 알베르트 슈페어의 작품. 좌우 대칭과 균형을 강조한 권위주의적인 건축물이다. ②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월트디즈니 콘서트홀. 게리의 ‘곡면 건축’을 대표하는 작품이다.③건축가 김인철은 동선이 긴 ‘숲에 앉은 집’을 통해 ‘느리게 살기’를 제안한다. 효형출판 제공
① 히틀러 집권기에 건설부 장관을 지낸 알베르트 슈페어의 작품. 좌우 대칭과 균형을 강조한 권위주의적인 건축물이다. ②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월트디즈니 콘서트홀. 게리의 ‘곡면 건축’을 대표하는 작품이다.③건축가 김인철은 동선이 긴 ‘숲에 앉은 집’을 통해 ‘느리게 살기’를 제안한다. 효형출판 제공
“우리는 건물을 만들고, 건물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

이상현 명지대 건축학부 교수는 “건축을 통한 길들이기는 일상과 밀착돼 있어 알아채기 어렵고, 알아챈다 해도 규모가 커서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이상현 명지대 건축학부 교수는 “건축을 통한 길들이기는 일상과 밀착돼 있어 알아채기 어렵고, 알아챈다 해도 규모가 커서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건축하는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문장이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가 1940년대 전후 의회 건물 재건축과 관련한 연설에서 한 말로 알려져 있는데, 사람들이 건축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뜻을 담았다.

그런데 이상현 명지대 건축학부 교수(49)는 “처칠이 말한 ‘우리’는 ‘그들’과 ‘우리’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며 새 책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효형출판)에서 이렇게 고쳐 썼다. “‘그들’이 건물을 빚어내고, 건물은 ‘우리’를 빚어낸다.”

“건축은 인간의 불평등을 구현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건축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이 교수는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의 건축을 예로 들었다. 당시 건물을 만든 ‘그들’은 양반들이었다. 그들은 △행랑채 앞마당에 선 하인이 사랑채 주인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도록 사랑채 바닥을 돋우어 짓고 △제사 공간으로 오르는 계단의 디딤판 폭을 좁게 만들어 몸을 옆으로 돌려 조심조심 오르게 길들였으며 △경복궁에 금천을 흐르게 함으로써 왕과 신하의 공간을 구분했다.

건축을 통한 길들이기와 저항은 독일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와 한스 샤룬의 작품을 비교하면 명확해진다. 히틀러의 제3제국에서 건설부 장관을 지낸 슈페어는 설계하는 건물마다 중앙에 주조를 배치하고 열주랑과 높은 기단을 썼다. 균형과 안정감을 갖춘 권위주의적 건축을 통해 히틀러의 제국이 영원하리라 착각하도록 독일인을 길들인 것이다.

반면 샤룬의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에는 나치의 선전도구로 쓰인 건축에 있던 주조도, 기단도, 열주랑도 없다. 야구장처럼 여러 개의 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서게 되며 공연장 내부도 구역별로 잘게 나뉘어 있다. “다수가 한자리에 모여 질서정연하게 한곳을 바라보는 공간 구조는 나치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생각한 거죠. 나치 식 길들이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담은 건축입니다.”

샤룬이 건축으로 나치즘을 반성했듯, 건축은 선한 의도를 가질 수 있다. 이 교수는 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설계한 월트디즈니 콘서트홀(2003년)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이 작품은 부정형의 곡면 디자인이 특징이다. “인종 갈등이 치열한 사회에서 모든 이에게 환영받으려면 아무도 전에 본 적이 없는, 그래서 과거의 불편한 기억을 누구도 떠올릴 수 없는 형태를 찾아야 했고, 그러한 가치중립적 형태가 곡선이었습니다. 이 건축물에 상을 준다면 프리츠커 상이 아니라 노벨 평화상을 주는 게 맞을 겁니다.”

결국 건축가란 ‘길들여진 인간’들을 깨우고 새로운 가치를 선언하는 존재가 돼야 한다. 책에는 건축가 김인철의 ‘숲에 앉은 집’이 나온다. 이 집은 60m 길이의 직선 복도를 따라 방들이 늘어서 있다. 한쪽 끝에서 다른 끝쪽 방으로 가려면 60m를 걸어야 한다. 속도의 시대에 ‘느리게 살기’를 제안한 것이다.

이 교수는 최근 완공한 서울시 신청사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새 시대에 어울리는 서울의 새로운 가치를 선언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게 없었고, 기능적인 부분을 포기하면서 심미성을 추구했는데 그것마저 실패했다는 평가다.

이 책은 전문적인 주제를 흥미롭게 풀어낸 수작이지만 여기 담긴 환경 결정론적인 시각은 불편하다. 같은 공간도 쓰는 사람에 따라 용도와 가치는 달라질 수 있는데 말이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이상현#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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