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ste/그남자의 CAR] 왜건 타는 사내들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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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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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건

BMW의 525d 투어링. BMW코리아 제공
BMW의 525d 투어링. BMW코리아 제공
1970년대에는 자동차가 부의 상징이었고, 1980년대에는 자수성가의 증명서였다. 당시의 자동차는 어디까지나 A지점에서 B지점까지 이동하는 교통수단이었지만, 1990년대 들어서부터 조금 다른 용도로 쓰이기 시작했다. 압구정동, X세대, 오렌지족이 뜨면서 ‘야타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이들은 자동차를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라 데이트와 즉석 만남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전 세대처럼 남들이 자신의 차를 봐 주길 바라는 수동적인 자랑에서 벗어나 자동차를 이용해 자신의 첫인상을 전달하려는 능동적인 사용법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자동차 운전석에서 “야, 타” 하고 한마디를 던지고, 그 말을 들은 여자들은 무척 짧은 순간에 차종과 목소리와 옷차림을 살핀 후 그들과 좀 더 친해질지 말지를 결정한다. 지금 세상엔 좀 위험하게 느껴지지만 1990년대 중반에는 압구정동이나 신촌 등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젊은이들의 문화다. 아마도 야타족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를 진정한 ‘라이프스타일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들일 것이다.

이후 세단 일색이던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에 점차 다양한 차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이 두 개밖에 없지만 좀 더 스타일리시한 외관을 뽐내는 쿠페가 등장했고, 가족이 좀 더 넓고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레저용 차량(RV)과 이전까지는 산골에 사는 사람들만 이용하는 줄 알았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단은 가장 점잖은 자동차 형태이긴 하지만 그 때문에 고루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슈트가 남자를 가장 멋지게 꾸며 주는 옷인 반면에 ‘양복쟁이’라고 하면 지루하고 고리타분하고 평범한 사람을 일컫는 말인 것과도 비슷하다. 세단 운전자는 보는 이에게 신뢰감을 줄 수도 있지만, 자칫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가령 골프장에 검정 세단을 타고 온 사람은 아무리 화려한 골프웨어를 차려입어도 ‘접대 골프’를 온 것처럼 보이게 마련이지만, 빨간색 스포츠카를 타고 골프장에 왔다면 그는 누가 봐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성공한 사업가로 보인다. SUV를 타면 비포장도로 한 번 가본 적 없어도 자연과 친근한 삶을 사는 사람처럼 보이고, 하이브리드 차를 타면 한여름에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수돗물을 틀어 놓은 채로 양치질하는 사람도 환경보호론자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유럽 사람들이 왜건을 사랑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 모든 라이프스타일이 가능한 차가 바로 왜건이기 때문이다. 왜건은 세단처럼 활용할 수도 있고, SUV처럼 활용할 수도 있다. 스포츠카나 세단처럼 땅바닥에 착 붙어서 달릴 수 있지만, SUV처럼 트렁크 공간이 넓어 레저 도구나 짐을 실을 수도 있다. SUV가 노골적으로 ‘오프로드’나 ‘캠핑’을 연상시킨다면 왜건은 안에 스키나 텐트, 골프백, 자전거, 혹은 악기에 이르기까지 뭘 실어도 좋기 때문에 더 멋지게 느껴진다.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에 응용할 수 있는 왜건은 그 차를 운전하는 사람의 패션과 어우러지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운전자의 라이프스타일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상상력이 부족했던 옛날 사람들은 왜건을 보면서 ‘운구차’를 떠올렸지만 유러피안 패션에 익숙한 요즘 세상에 왜건을 보고 장례식 운운했다가는 센스 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세단 일색의 풍경에서 조금 벗어나고 싶은 멋쟁이라면 왜건이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신동헌 남성지 ‘레옹’ 부편집장·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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