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4·4조 한국어 가사, 귀에 착착 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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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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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레 미제라블’ ★★★★

‘레 미제라블’ 한국어 공연을 통해 정성화(가운데 뒤)는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뮤지컬 배우로 섰다. 그의 왼쪽에 선 조정은(판틴)과 오른쪽의 박지연(에포닌)은 동일한 선율을 서로 다른 애절함으로 물들이는 ‘한때는 꿈을 믿었네’(아이 드림드 어 드림)와 ‘나 홀로’(온 마이 오운)를 들려준다. 가운데 앞은 사랑의 테마 ‘사랑 한 가득’(어 하트 풀 오브 러브)을 싱그러운 목소리로 들려주는 신예 이지수(코제트)와 조상웅(마리우스). 레미제라블코리아 제공
‘레 미제라블’ 한국어 공연을 통해 정성화(가운데 뒤)는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뮤지컬 배우로 섰다. 그의 왼쪽에 선 조정은(판틴)과 오른쪽의 박지연(에포닌)은 동일한 선율을 서로 다른 애절함으로 물들이는 ‘한때는 꿈을 믿었네’(아이 드림드 어 드림)와 ‘나 홀로’(온 마이 오운)를 들려준다. 가운데 앞은 사랑의 테마 ‘사랑 한 가득’(어 하트 풀 오브 러브)을 싱그러운 목소리로 들려주는 신예 이지수(코제트)와 조상웅(마리우스). 레미제라블코리아 제공
뮤지컬 ‘레 미제라블’(이하 ‘레미즈’)은 1996년 국내에 처음 상륙했다. 동아일보 주최,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였다. 국내 공연계엔 이 작품을 접한 뒤 ‘내 생애 최고의 뮤지컬’로 꼽는 이가 수두룩하다. 레미즈는 당시까지만 해도 뮤지컬 하면 떠올랐던 가볍고 경쾌한 분위기를 깨고 숭고한 이야기와 오페라에 필적할 감동적 선율, 그리고 혁신적인 무대연출이 결합된 ‘문화적 충격’을 안겨줬다.

한국 뮤지컬이 ‘시장’에 눈을 뜬 게 2001년 상륙한 ‘오페라의 유령’을 통해서였다면 ‘작품’에 눈을 뜬 것은 1996년 레미즈를 통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의 정식 한국어공연이 올라가는 데 16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데에는 이 작품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도 한몫을 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듯하다.

그만큼 ‘응답하라 1996’의 심정으로 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다소 어리둥절할 수 있다. 1996년 공연에서 레미즈의 무대는 객석으로 살짝 기울어진 대형 무대를 거의 텅 비우다시피하면서 배우와 노래의 힘으로 작품을 끌고 갔다. 영국 연출가 중에서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최고의 연출가로 꼽히는 트레버 넌은 회전무대와 강렬하지만 미니멀한 무대세트를 활용해 원작에 걸맞은 ‘공간의 깊이’를 창조해냈다.

2010년 레미즈 발표 25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세계투어공연 버전의 이번 무대는 수평적 깊이를 포기한 대신 수직적 높이의 미학을 보여준다. ‘미스 사이공’과 ‘오페라의 유령’ 뉴 버전의 연출을 맡은 젊은 연출가 로런스 코너와 무대디자이너 맷 킨리는 무대공간을 축소하면서 빅토르 위고가 직접 그린 그림과 삽화를 포함해 주로 흑백 톤의 벽걸이 무대화에 조명과 최소한의 동영상을 가미해 시각적 풍성함을 보여줬다. 이와 함께 무대 좌우에 치솟은 무대세트를 활용해 옛 버전의 수평적 공간 활용을 수직으로 전환했다.

진짜 묘미는 노래로만 진행되는 ‘송스루’ 뮤지컬의 영어가사들을 어떻게 한국어로 바꿨는지를 감상하는 데 있다. 국내에선 원작의 향취를 살린다는 이유로 핵심 가사나 반복되는 후렴구를 영어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이번 공연의 한국어 가사를 맡은 조광화 씨는 그런 유혹에서 과감히 벗어나 전 가사를 맛깔난 한국어로 바꿨다.

죄수들이 갤리선의 노를 젓는 장면에 등장하는 ‘룩 다운, 룩 다운’을 ‘낮춰 낮춰’로 바꿨고 혁명에 대한 열정이 소름 끼치게 전달되는 ‘레드 앤드 블랙’의 레드와 블랙도 ‘붉게∼’와 ‘검게∼’로 바꿔 노래의 역동성을 살렸다. 에포닌(박지연)의 애절한 짝사랑을 담은 ‘온 마이 오운’은 ‘나 홀로’로, 장발장(정성화)의 눈물겨운 희생정신을 담은 ‘브링 힘 홈’은 ‘집으로’로 번역됐는데 3음절로 된 영어가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압권은 부부 사기꾼인 테나르디에 부부(임춘길, 박준면)가 사람들을 등쳐먹을 때 부르는 속어 만발의 노래 가사를 해학적 한국어로 바꿨을 때다. ‘어서 옵쇼/ 앉아 보셔/신발 벗으셔/여독 푸셔/엄청 무거’식으로 한국인에게 친근한 4·4조의 가사 번역에 이례적으로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가장 눈물겨웠던 것은 역시 배우들이었다. 정성화 문종원(자베르) 김우형(앙졸라) 조정은(판틴) 박지연 등 웬만한 뮤지컬 주연급 배우들이 혼신을 다하는 노래를 들으며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꿰맸다’는 표현이 떠올랐다. 특히 한 옥타브 낮은 C음을 진성으로 부르다 한 옥타브 높은 B#의 음을 가성으로 연달아 소화해야 하는 정성화는 두어 차례 음 이탈로 진땀을 빼긴 했지만 예의 탄탄한 연기로 뜨거운 갈채를 끌어냈다. 신예 조상웅(마리우스) 이지수(코제트) 커플은 흡인력은 부족했지만 풋풋함이 살아 있었다. 그렇게 레미즈의 첫 한국어 공연은 완벽하진 않았지만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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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까지 경기 용인시 포은아트홀에서. 12월 7일∼내년 1월 20일 대구 계명아트홀, 내년 2월 1일∼3월 3일 부산 센텀시티 내 소향아트센터, 내년 4월 9일부터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무기한 공연. 7만∼13만 원. 1544-1555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뮤지컬#레 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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