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5·18 현장서 마음 먹었다, 독일 李씨 시조가 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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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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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참 사장의 인생을 바꾼 대한민국

이참 사장은 한국 사람과 독일 사람은 세 가지가 비슷하다고 했다. 정이 많고, 애국심이 유별나며, 무한한 자신감을 가졌단다. 자신이 한국에 깊이 빠져버린 데에는 분명 그런 이유도 있을 거라고 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이참 사장은 한국 사람과 독일 사람은 세 가지가 비슷하다고 했다. 정이 많고, 애국심이 유별나며, 무한한 자신감을 가졌단다. 자신이 한국에 깊이 빠져버린 데에는 분명 그런 이유도 있을 거라고 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친구들은 아직 널브러져 있었다. 전날 밤 술이 좀 과하긴 했다. 민박집 방바닥은 여태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이런 게 시골인심이구나’ 피식 웃음이 났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다. 그래도 주섬주섬 옷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파란 새벽의 찬 기운에 지끈거리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술도 깰 겸 뒷산에 올라볼 참이었다. 산은 높지 않았다. 30, 40분 오르니 꼭대기였다. 아침 안개가 자욱했다. 건너편 산등성이에 걸린 안개로 하얀 여백이 그려졌다. 아래로는 누런 초가지붕들이 따스함을 자아냈다. 그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초록색 기와지붕. 어색했지만 그 또한 매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미치도록 고요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이런 것이었구나. 그때였다. ‘움∼메∼∼.’ 한없이 지속될 것 같던 정적이 서서히 갈라졌다. 구슬픈 소 울음은 산 아래 펼쳐진 동양화 한 폭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감동은 늘 그랬듯, 갑자기 찾아왔다.》

왠지 이 나라에 오래 머물게 될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리 됐다. 이참 한국관광공사 사장(58)은 34년 전 그 장면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하룻밤을 머물렀던 강원도 어디쯤이었다.

낯선 나라

1978년 9월. 20대 중반 당시 이름은 베른하르트 크반트였다. 대학에서 신학과 불문학을 전공한 그는 유럽국제문화재단의 독일지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낯선 발신인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한 종교재단이 한국에서 종교 관련 국제세미나를 개최하는데, 일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유럽에선 프랑스인 영국인 스페인인 이탈리아인은 찾았는데 독일인 지원자만 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종교를 공부했고, 6개 국어(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를 하던 그에겐 딱 맞는 일이었다. 조건도 좋았다. 6개월간 집과 자동차, 체재비를 제공하고 왕복 비행기표와 많진 않았지만 월급도 준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를 깊숙이 자극한 건 동양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중국이나 일본에 가 볼 작정이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또 일을 할 때도 시간을 쪼개 여행을 즐겼지만 유럽을 벗어나긴 힘들었다. 아시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꿈틀대던 시절이었다. 한국이라. 낯설긴 했지만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출국 날짜는 고작 일주일 후였다. 사표부터 던지고 보니 막상 한국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남한과 북한이 있고 한쪽은 공산정권, 한쪽은 군사독재라는 것밖에. 변변한 한국어사전도 찾지 못했다. 독일에 있던 한국 식당부터 닥치는 대로 찾아갔다. 거기서 ‘김치’와 ‘불고기’를 배웠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키 196cm의 독일 청년이 아는 한국말이라곤 ‘안녕하세요’와 ‘얼마예요’ 딱 두 마디뿐이었다.

업무 시작까진 5일이 남아 있었다. 안내를 맡은 한국인은 영어를 못해 그냥 돌려보냈다. 혼자 부닥쳐 보기로 했다. 영한사전과 서울지도부터 샀다. 그러고는 무작정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둘째 날엔 한국어 선생을 찾았다. 다행히 고려대 강사 한 명과 연결이 됐다.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사귀고 있던 여강사는 프랑스어를 배우길 원했다. 자연스럽게 하루는 한국어를 배우고 다음 날은 프랑스어를 가르쳐주는 재능 교환이 이뤄졌다.

반년 동안의 체류 기간에 틈나는 대로 한국 체험에 나섰다. 서울을 섭렵하고 한국말도 더듬더듬 하게 되자 무대를 넓혔다. 서울에도 외국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시골은 오죽했으랴. 어른보다 머리 하나는 큰 푸른 눈의 거인이 나타났다며 동네 아이들이 뒤를 졸졸 따르기 일쑤였다. 할머니들은 마치 외계인이라도 본 듯 거침없이 만져댔다. 싫진 않았다. 한국 사람들에겐 왠지 모를 따뜻함이 있었다. 그걸 한국에선 ‘정(情)’이라고 했다. 정은 정말이지 중독성이 꽤 강했다.

아내의 나라

사실 한국에 왔을 땐 계약기간만 채울 심산이었다. 기대도 크지 않았고, 6개월이면 충분히 긴 시간이라고 봤다. 그런데 생각이 달라졌다. 핑계거리는 언어였다. 사실 체계가 완전히 다른 한국어는 쉬운 정복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국어를 아는 외국인이 거의 없었기에 잘 배워두면 가치가 있을 것 같았다. 일단 한국어를 제대로 할 때까지만 더 머물기로 했다.

한국은 한마디로 재미있는 나라였다. 자연은 아름다웠고 문화는 매력적이었다. 사람들도 친근했다. 어색함을 풀기까진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 마음을 터놓으면 모두가 형제였다. 1970년대 말의 한국 경제는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이들에겐 에너지가 있었다. 훨씬 잘살던 이웃의 일본인보다도 활기가 넘쳤다. 그들과 함께 하다 보니 ‘6개월만’이 ‘1년만’이 되고 또 ‘올해까지만’으로 연장됐다. 그러면서 저울추는 ‘돌아가기’에서 ‘머물기’로 점점 기울어갔다.

처음엔 주로 외국어를 가르쳤다. 독일문화원, 대학, 학원을 가리지 않았다. 개인지도를 부탁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사업가 예술가 변호사 등이 주요 고객이었다. 해외연수를 앞둔 공무원이나 유학을 준비하던 성악가도 그를 찾았다. 수입도 짭짤했고 인맥까지 넓어졌다. 그러다 보니 생각지 않았던 일도 하게 됐다. 친분이 있던 사업가를 독일 회사와 연결해주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 외국 출장도 함께 갔다. ‘이젠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하면 흥미로운 일거리가 생기고 ‘이젠 정말 가야지’ 하면 또 다른 일을 맡았다. 그가 남은 게 아니라 마치 한국이 그를 잡은 것처럼.

1980년 봄, 그도 광주에 있었다. 유혈사태가 벌어진 뒤 미국 언론인들이 그에게 현지 안내를 부탁했던 것이다. 한국어가 유창하진 않았지만 그만큼 하는 이도 찾기 힘들었다. 광주엔 여전히 총탄이 날아다녔다. 전장 같은 그곳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나라의 역사적 증인이 됐구나.’ 한국이 아닌 내 나라의 역사라고 말이다. 그는 그렇게 한국말을 하는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지금의 아내 이연진 씨(55)에게 반한 것도 사실 ‘한국적인 매력’ 때문이었다.

“한국 여자를 많이 만나 봤지만 모두 표현도 적극적이고 말도 많았어요. 아마 외국인을 만나서 일부러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그런데 이 사람은 항상 겸손하고 웃을 때도 손을 가리고 ‘호호호’ 이렇게만 웃더라고요. 딱 책에서 본 전통적 여인상이었습니다.”

둘은 교회에서 소개로 만난 지 1년 만인 1982년 결혼했다. 한국은 아내의 나라가 됐다. 한국에서 그를 이방인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의 조국

1986년 첫아들 복단이가 태어났다. 한국인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지만 신분은 여전히 외국인이었다. 비자가 가장 문제였다. 체류기간(2년)이 임박하거나 직장을 옮기면 어김없이 비자를 갱신해야 했다. 오직 비자 신청을 하기 위해 해외에 나갔다 들어오는 일이 반복됐다. 서류 처리가 늦어지면 일본에서 두 달씩 기다리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도 부담됐지만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잘 쌓아둔 인맥이 그때 빛을 발했다. 독일어를 배웠던 한 검사가 법무부에 있었다. 한두 번 비자 갱신을 도와주던 그 검사는 아예 귀화를 권했다. 비자를 갱신하기도 어려운데 귀화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8년을 사는 동안 이미 귀화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형식적인 절차만 밟으면 됐다. 한국어나 한국사 시험 등은 식은 죽 먹기였다. 독일인 중에는 세 번째, 독일 남자로서는 그가 첫 귀화인이었다.
▼ “먼저 간 동생의 치열한 삶이 한국인으로 살아갈 용기 줬죠”

그는 ‘독일 이씨’의 시조가 됐다. 사랑하는 한국에서 살기 위해 더이상은 어떤 서류도, 어떤 이유도 필요하지 않았다. 한국은 서른둘의 나이에 그가 직접 선택한 조국이었다.

그는 정말 다양한 일을 해왔다. 외국어를 가르쳤고 기업 컨설턴트로 활약했다.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해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고 여러 차례 사업체를 운영하기도 했다. 어떤 것에도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2009년엔 공기업 사장이라는 자리까지 맡았다. 그는 한순간도 현실에 안주하고 싶진 않다고 했다. 그래서 안전한 길이 아니라도 항상 도전해왔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1973년 독일. 군에 있던 한 살 터울의 베른하르트, 클라우스 형제는 여름휴가에 맞춰 어린이들을 위한 산악캠프를 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매년 하던 행사였다. 6남매 중 첫째인 베른하르트는 키가 컸고 둘째인 클라우스는 작은 편이었다. 힘은 동생이 더 셌다. 형은 언어에, 동생은 수학에 뛰어났다. 모든 게 달랐지만 둘은 서로를 세상 누구보다 아꼈다. 캠프가 끝나고 하루 먼저 부대에 복귀한 형은 자신의 자동차를 동생에게 빌려줬다. 다음 날 동생은 부대로 돌아가다 교통사고를 냈다. 트럭 밑에 깔린 승용차 안에서 숨을 거뒀다. 장례식에 참석한 수백 명이 동생과의 이별을 슬퍼했다. 형은 눈물을 삼키며 되뇌었다. 동생처럼 순간순간을 정말 가치 있게 살겠다고, 내 앞에 놓인 어떤 일이라도 보람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겠다고.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베른하르트가 한국에 올 용기를 낸 것도, 그리고 이참이라는 한국인이 된 것도 어쩌면 클라우스가 남긴 선물은 아니었을까.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이참#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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