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꽃과의 대화]알뿌리의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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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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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왼쪽)과 수선화의 알뿌리.
튤립(왼쪽)과 수선화의 알뿌리.
탐스러운 열매가 달린 과일나무와 알알이 익은 가을 들녘 곡식을 보면 문득 ‘올 한 해 동안 나는 무엇을 했고, 무엇을 이루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자연의 풍성한 결실을 마주하면 인간이란 존재가 언제나 왜소하게만 느껴진다. 논의 벼 같은 한해살이 식물과 ‘다년생(?)’인 인간을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나름 열심히 일했고 어느 정도 성과도 얻은 것 같은데, 자꾸만 허전한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이런 게 가을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한편으론 풍성한 곡식이며 탐스러운 열매들은 이전 계절의 준비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으리란 생각도 해 본다. 꽃도 그렇다. 봄에 피는 화사한 꽃들은 대부분 이전 해에 생긴 꽃눈에서 피어난다. 그런 마음으로 화사한 내년 봄을 기약하며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봄에 꽃을 피우는 알뿌리 식물을 심는 것이리라.

알뿌리 식물은 흙 속의 비대한 뿌리(정확히는 땅속 잎이나 줄기도 포함)에 양분과 수분을 저장한다. 알뿌리는 번식의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가 많이 먹는 양파와 마늘은 잎에, 감자와 생강은 줄기에, 고구마는 뿌리에 영양분을 저장하고, 이것을 우리가 섭취하는 것이다.

식물이 생장에 불리한 환경(추위나 건조)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식물들은 잎을 떨어뜨리고 휴면하거나(나무), 씨앗으로 지내거나(한해살이풀), 잎과 줄기는 시들고 뿌리만 살아남거나(여러해살이풀) 하는 방법으로 삶을 이어간다. 땅속으로 들어간 기관(뿌리, 잎, 줄기 등)에 양분과 수분을 듬뿍 저장하는 알뿌리는 여러해살이풀의 생존전략 중 하나다. 이런 전략을 간파한 인류가 그들의 저장 양분을 빼앗아 먹는 것이다.

알뿌리 꽃식물의 원산지는 온대와 아열대로 나뉜다. 온대 원산으로 봄철에 꽃이 피는 튤립, 수선화, 히아신스, 무스카리, 크로커스는 가을에 심는다. 열대와 아열대 원산으로 여름에 꽃이 피는 백합, 달리아, 글라디올러스, 칸나는 봄에 심는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이번 주말에 시간이 나면 알토란같이 예쁜 튤립 알뿌리를 구해 화단 한구석에 심어보면 어떨까. 처음에만 물을 주고 겨울 동안에는 그 존재를 잊어버려도 된다. 그동안 튤립 알뿌리는 추위를 견뎌내며 꽃눈을 만든다.

내년 3월이 되면 큼지막한 잎이 흙을 가르며 불쑥 솟아오를 것이다. 이때는 다른 이들이 새싹을 무심코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4월 말이 되면 화사한 튤립 꽃이 오므렸다 벌렸다를 반복하며 2, 3일간 핀다. 다만 요즘같이 이상고온이 계속되면 튤립 꽃이 활짝 피어버린다는 게 아쉽다. 튤립 특유의 수줍게 오므린 모습을 보기 어려운 것이다. 튤립 꽃은 기온이 20도 이상이 되면 꽃잎 안쪽 표피세포가 바깥쪽의 것보다 빨리 자라 활짝 피어버린다.

튤립 꽃이 진 후에는 내년 준비를 위해 알뿌리를 계속 키워야 하는데,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여름 장마철에 알뿌리가 썩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수선화나 무스카리, 크로커스는 문제없이 계속 알뿌리가 켜져서 다음 해에 꽃을 피우므로 그냥 심은 채 놔두면 된다. 크로커스의 경우 꽃이 핀 후 잎이 말라버리는데, 뿌리는 살아있으니 버리면 안 된다.

가을이나 겨울에 이듬해 찾아올 봄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년 봄을 위해 알뿌리 꽃식물을 심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간절하지 않을까 한다. 어느 시인은 ‘계절은 가장 오래 기다린 자를 위해 오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래도 봄은 가장 오래 간절히 기다린 자를 위해 온다는 믿음으로 오늘 튤립과 수선화 알뿌리를 심어본다.

서정남 농학박사(농림수산식품부 국립종자원) suhjn@korea.kr
#알뿌리#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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