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에 잠들어 새소리에 눈뜨면, 문틈 사이 햇살의 인사

  • Array
  • 입력 2012년 7월 20일 03시 00분


코멘트

고택에서의 하룻밤 ― 세계문화유산 경주 양동마을 이향정을 찾아

14일 경주 양동마을을 방문한 기자는 중요민속자료 제79호로 지정된 이향정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건넌방에서 바라본 안채(왼쪽)와 사랑채.
14일 경주 양동마을을 방문한 기자는 중요민속자료 제79호로 지정된 이향정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건넌방에서 바라본 안채(왼쪽)와 사랑채.
《 빗소리부터 달랐다. 흙바닥에 빗살이 사뿐히 내려앉는 소리와 처마에 방울져 있다가 퉁 떨어지는 소리, 빗물이 시내를 만들어 졸졸 흐르는 소리가 어우러졌다. 2평 남짓한 건넌방에 앉아 고개를 숙여야만 드나들 수 있는 여닫이창문 밖 마당과 장독대, 사랑채를 바라봤다. 빗소리와 함께. 300년 전 오늘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으리라. 》

경북 경주 양동마을은 2010년 7월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두 가문이 550년 넘게 살아온 조선시대 대표적 씨족 마을로 마을과 고택(古宅) 형태가 잘 유지돼 있다. 14일 양동마을을 방문한 기자는 중요민속자료 제79호로 지정된 이향정(二香亭)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1695년(숙종 21년) 건축된 이향정은 온양군수 이범중 공과 그 맏아들인 담양부사 이헌유 공이 살던 집이다. 이향정은 이범중 공의 호다.

안채와 사랑채, 아래채, 방앗간채 등 네 개 건물이 ‘ㅁ’자 형을 이루고 있다. 기자가 머문 곳은 아래채의 건넌방으로 이 고택에서 가장 작은 방이다. 혼인 전 어린 자녀가 주로 머물렀다고 한다. 방앗간채에는 발로 디뎌 곡식을 찧는 디딜방아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사랑채엔 ‘만취재(晩翠齋)’라고 적힌 편액(扁額·방이나 문 위에 걸어놓는 액자)이 걸려 있다. 양동마을에서 유일한 초서체 편액이다.

마침 이 집의 주인이자 후손인 이동욱 씨(59)가 사랑채에 묵고 있었다. 부산에서 건축 일을 한다는 이 씨는 이곳에서 태어나자마자 외지로 떠났지만 주말이면 이향정을 찾는다. 괜스레 마음이 편해져서다. 집 밖을 나오자 나지막한 뒷산에 소나무 다섯 그루와 백일홍이 보였다. 이 씨는 “증조할아버지가 아들 다섯을 두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소나무 다섯 그루를 심으셨다. 사람은 나고 가지만 소나무는 여전히 잘 자라고 있다”며 웃었다.

양동마을은 ‘외손(外孫)마을’로 불린다. 부유한 처가 덕을 본 남자가 씨족의 시작이기 때문. 경주 손씨 입향조(入鄕祖)인 손소 공이 부자였던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처가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아 이곳에 살게 됐다. 여강 이씨 이번 공도 손소 공의 7남매 중 차녀와 결혼해 이곳으로 옮겨왔고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유학자 회재 이언적 공을 낳았다. 양동마을 문화해설사인 김명선 씨는 “조선 초만 해도 남자가 처가를 따라가 사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마을과 고택의 형태가 잘 유지돼 있는 양동마을 전경. 지금이라도 한복 입은 아이가 대문을 열고 뛰어나올 것만 같다.
마을과 고택의 형태가 잘 유지돼 있는 양동마을 전경. 지금이라도 한복 입은 아이가 대문을 열고 뛰어나올 것만 같다.
이 마을엔 관가정, 향단, 무첨당, 서백당 등 200년 이상 된 고택 54호(戶)가 보존돼 있다. 양반이 살던 기와집들로 산 위에 위치한다. 그 아래 외거 하인들이 살던 초가집이 3∼5채씩 딸려 있었다고 한다. 마을 내 물봉동산에 올라가니 우리나라 가옥 구조가 한눈에 보였다. 기자가 방문한 날은 비가 주룩주룩 내렸지만 관광객이 무척 많았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 외국인들도 꽤 눈에 띄었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과 그 공간에서 생활하는 건 전혀 다르다. 아침 무렵 문지방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과 공기, 새소리, 그리고 구석구석 살펴본 공간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듯한 상상은 하룻밤이라도 묵어 본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다. 최근 정비된 고택들은 수세식 화장실을 갖춰놓았다. 31일부터 8월 2일까지 이곳에서는 세계문화유산 등재 2주년을 기념하는 ‘양동마을문화축제’가 열린다. 054-762-2633

경주=글·사진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세계문화유산#경주 양동마을#이향정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