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Life]민화 그리기 취미 전국에 10만여 명… 화사한 색감-통쾌한 풍자, 그 치명적 매력에 빠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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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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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후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어울림누리의 한 강의실에서 ‘실용 민화 그리기’ 수강생들이 붓끝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이곳뿐 아니라 전국의 수많은 문화센터와 지역문화재단, 박물관 등의 민화 강좌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고양=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3일 오후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어울림누리의 한 강의실에서 ‘실용 민화 그리기’ 수강생들이 붓끝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이곳뿐 아니라 전국의 수많은 문화센터와 지역문화재단, 박물관 등의 민화 강좌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고양=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민화 열풍이 거세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민화가 눈에 띈다. 지난달에는 서울 남산한옥마을, 부산 롯데백화점, 경기 부천시청 등 곳곳에서 용을 주제로 한 민화전시회가 열렸다. 심지어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국교육원에서도 민화가 전시됐다.

전시회마다 사람들이 붐비고, 그렇게 민화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은 앞 다퉈 민화강좌로 몰린다. 열풍은 비단 취미생활에서뿐이 아니다. 건축 패션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민화를 활용한 디자인을 시도하고 있고, 학계에서도 민화를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우리나라 대중의 대표적 예술임에도 그동안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했던 민화. 이른바 민화의 ‘화려한 귀환’인 셈이다. 왜 사람들은 다시 민화에 열광하게 됐을까.

○ 민화를 그리는 사람들

1일 오전. 전날 내린 폭설과 영하 15도까지 내려간 한파 탓인지 거리엔 인적마저 드물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어울림누리의 한 강의실에서도 빈자리가 제법 눈에 띈다. 그러나 저마다의 세계에 집중한 수강생들의 열기만큼은 한파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뜨겁다. 뒤늦게 도착한 지각생들도 서둘러 붓과 물감을 챙긴 뒤 작품에 빠져들기 위한 심호흡에 들어간다. 고양문화재단 어울림문화학교에서 운영하는 ‘민화 그리기’(3개월 과정) 수업 풍경이다.

왼쪽부터 추계도(한지에 채색), 연화도 모시발(모시에 염료채색), 화조도(한지에 채색). 추계도와 화조도는 수강생들이 그린 민화이고, 연화도 모시발은 강사인 박정희 씨가 여름에 걸어두기 위해 만든 실용민화다. 고양=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왼쪽부터 추계도(한지에 채색), 연화도 모시발(모시에 염료채색), 화조도(한지에 채색). 추계도와 화조도는 수강생들이 그린 민화이고, 연화도 모시발은 강사인 박정희 씨가 여름에 걸어두기 위해 만든 실용민화다. 고양=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수강생들이 민화를 그리는 이유는 가지가지다.

서울 목동에서 온 유순아 씨(49·여)는 짧은 시간이 아쉽다. 올해 여름이나 가을쯤 친정 식구들이 있는 미국 버지니아 주로 이민을 갈 예정이기 때문.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미국에서 한국 아이들에게 민화를 가르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유 씨는 “해외 동포들도 민화에 관심이 많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으면 초등학교 교사 경험을 살려 미국에서 민화 그리기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육아휴직 중인 중학교 교사 강선희 씨(32·여)는 태교로 민화를 시작한 경우. 임신 후 태교에 적당한 취미를 찾고 있었는데 동료 교사가 민화를 권했다. 학창시절 미술을 좋아했던 것도 쉽게 마음을 먹은 이유가 됐다.

“정말 태교에 도움이 됐는지 아기가 생후 6개월쯤 됐을 때 수업장소에 데려왔더니 혼자서도 잘 놀던걸요.(웃음)”

이날 가장 먼저 도착한 ‘청일점’ 김모 씨(67·쑥스럽다며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요청)는 그림을 그리는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2년 전 은퇴한 뒤 소일거리로 이것저것 해봤지만 6개월 전 시작한 민화 그리기가 제일 만족스럽다고 했다. 그의 네 딸도 아버지의 새 취미를 한목소리로 응원한단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그리는 건 아닙니다. 자족하는 거죠. 혹시 애들이 필요하다고 하면 하나씩 표구해서 선물할 수도 있겠죠. 허허.”

강사인 박정희 씨(62·여)는 민화를 그린 지 20년, 가르친 지는 10년째에 접어드는 베테랑이다. 취미로 시작했다가 ‘밝은 색감’ 때문에 깊이 빠져버렸다는 그는 민화의 장점을 한 가지로 단언한다. 배우기 쉽다는 것. 민화는 대부분 옛 그림을 베껴 그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처음 배우는 사람도 그럴듯한 작품을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설명이다.

“예전엔 민화를 ‘무속화’라고 잘못 인식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불교에서 쓰는 ‘불화(佛畵)’와도 헷갈려했고. 민화는 대중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우리나라 전통그림이자 풍속화예요.”

○ 현대적 공간에도 민화 바람

민화를 배울 수 있는 곳도 전국적으로 크게 늘어나고 있다. 롯데, 현대, 갤러리아 등 백화점은 물론 이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마트들의 문화센터들도 3월부터 시작되는 봄 학기에 적게는 1, 2개에서 많게는 20개의 민화 강좌를 마련했다. 각 지역 문화재단이나 박물관에서 운영하는 강좌도 다수고, 민화작가들이 개인적으로 소규모 인원을 가르치기도 한다.

박 씨도 매주 7, 8곳을 돌며 민화 수업을 한다. 수요일인 이날은 고양어울림학교에서 오전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경기 파주시 지산중학교의 민화동아리 수업이 잡혀 있었다.

관련 단체들은 현재 민화인구를 10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인사동의 미술품 관련 상점들을 아마추어 민화작가들이 먹여 살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실제 한국민화협회(정회원 350여 명) 주관의 회원전(올해 17회, 8월 전시)과 공모전(올해 5회, 7월 심사 11월 전시) 규모도 날로 커지고 있다. 신동식 한국민화협회 회장은 “예전에는 충청도나 경상도를 중심으로 민화인구가 많았지만, 지금은 전국으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단순히 수만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현대미술은 물론 타 산업과의 접목이 활발해지면서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박 씨가 4년간 맡아온 서울 중구 가회동 북촌문화센터의 야간강좌(월, 화)만 보더라도 그렇다. 미술이나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는 대학생부터 건축가, 동화작가, 인테리어사업가 등 수강생들의 배경도 다양하다. 아름다운 색감, 유쾌 통쾌한 풍자, 상징적 표현 등 민화의 치명적 매력들을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는 것이다.

북촌문화센터에서 수업을 듣는 김국선 김포대 교수(실내건축디자인)는 “한중일 전통 주거문화를 비교 연구하다 보니 전통그림에도 관심을 가졌고, 자연스럽게 민화까지 접하게 됐다”며 “지금은 이 매력 있는 그림을 현대화된 공간에 어떤 방식으로 접목할지에 대해 고민 중”이라고 했다. 7년차 프리랜서 비주얼머천다이저(VMD)인 오명례 씨(31·여)는 “지난해 추석과 올해 설 각 백화점의 전체 콘셉트 시안을 보면 ‘책거리도’ 등 민화를 모티브로 한 것”이라며 “인테리어에서도 이미 민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콘셉트가 각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 외국인이 먼저 알아본 민화

국내에서는 한때 민화가 불쏘시개로 사용될 만큼 천대받던 때도 있었다. 민화의 아름다움과 가치가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해외가 먼저였다. 일본 민예운동의 창시자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가 1950년대 말 쓴 ‘불사의(不思義)한 조선민화’라는 칼럼이 기폭제가 됐다. 이후 일본 중국 미국 유럽 등으로 수많은 민화 작품이 건너갔고, 앞서 반출됐던 작품들도 새롭게 주목받게 됐다.

한국민화학회장인 정병모 경주대 교수는 “미국 포틀랜드에서 만난 한 퇴역군인은 우리 민화를 무려 600점이나 갖고 있었다. 1960년대 인사동의 한 종이가게에서 멀쩡한 그림들을 폐지로 쓰는 걸 보고 아까워서 자기가 가져왔다고 하더라. 우리 자산을 스스로 내버린 꼴”이라고 전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우리 민화의 소재를 찾아다닌 정 교수는 실제 일본 도쿄민예관, 프랑스 국립기메박물관, 미국 자연사박물관 등 해외에서 훨씬 많은 작품을 발견했다. 기메박물관의 경우 재프랑스 화가 이우환 교수가 평생 모은 100여 점의 작품을 기증받았다. 이 교수는 민화의 가치를 홀대하는 고국보다는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는 곳에 보관하는 게 옳다는 생각에서 기증을 결정했다.

한국에서 그나마 민화가 조금씩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다. 일등공신은 미국 하버드대 건축과 출신인 민속연구가 조자용 박사(1926∼2000). 그가 1967년 만든 ‘에밀레박물관’(1983년 서울 강서구에서 충북 보은군으로 이전)은 개인 소장품을 활용한 테마박물관 건립의 효시가 됐고, 인생을 바쳐 수집한 민화 자료들은 소중한 유산으로 남았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 역시 공신 중 한 명이다. 그의 남달랐던 민화 사랑으로 경기 용인시의 호암미술관에는 다수의 민화가 소장돼 있고, 1983년 개관 1주년 전시회로 ‘전통 민화전’이 열려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일본인 야나기가 수집한 작품들은 반세기가 지나 고향 한국에서의 뒤늦은 민화 열풍에 불을 지폈다. 2005년 서울역사박물관과 일본민예관이 공동개최한 ‘반갑다! 우리민화’전과 2006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문화적 기억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전은 최근 민화인구가 급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민화 열풍이 점차 거세지자 이론에 대한 목마름도 커지고 있다. 민화 이론을 가르치는 가회박물관의 ‘가회민화아카데미’는 지난해까지 21명의 수료자를 배출했다. 올 3월 시작하는 10기도 35명 모집인원을 넘겨 대기자가 3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성황이다. 지난달 9∼11일 경주에서는 한국민화센터 주최의 제1회 경주민화포럼 ‘한국민화와 중국민간연화’ 강연회가 열리기도 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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