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Life]모두를 위한 공리주의와 예술이 함께하는 공간

  • Array
  • 입력 2012년 1월 7일 03시 00분


코멘트

북유럽 공공디자인의 지혜-현장을 둘러보고

스웨덴 예테보리의 닐스에릭손 버스 터미널. 유리 지붕을 씌운 이 건물은 사용자와 환경, 디자인을 모두 고려한 이상적인 공간이다. 따뜻한 자연채광과 조명은 사람들에게도, 실내에 심어진 나무들에게도 생기를 준다. 안지훈 씨 제공
스웨덴 예테보리의 닐스에릭손 버스 터미널. 유리 지붕을 씌운 이 건물은 사용자와 환경, 디자인을 모두 고려한 이상적인 공간이다. 따뜻한 자연채광과 조명은 사람들에게도, 실내에 심어진 나무들에게도 생기를 준다. 안지훈 씨 제공
‘O₂’에 ‘빈티지 산책’ 코너를 연재했던 안지훈 씨가 최근 북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그곳의 공공디자인에 대한 원고를 보내왔습니다. 공항과 지하철, 심지어 버스 터미널에도 스며 있는 그들의 빼어난 디자인 감각과 그런 디자인이 태어난 배경이 무엇인지를 한번 알아볼까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북유럽 디자인은 좋은 취향을 가진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모두를 위해 존재한다. 북유럽에선 디자인이 일반인의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그곳 사람들은 디자인이란 생활 속에서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는 북유럽 특유의 민주주의 정신과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30년대 북유럽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이란 사회 구성원 누구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런 디자인 정신의 진수인 공공 디자인, 특히 사람들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교통과 관련한 북유럽의 디자인을 소개한다.

○ 공학, 빛의 미학

북유럽에 도착한 사람은 바로 공항에서부터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을 만나게 된다. 북유럽 공항들은 인천공항이나 파리 드골공항과 비교하면 상당히 크기가 작다. 항공운송의 허브 역할을 하기에는 위치나 승객 규모에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북유럽의 국제공항들은 디자인적 요소를 이용해 이용객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고, 나름대로의 경쟁력을 키워나가고 있다.

1. 덴마크의 코펜하겐 공항. 원목마루와 부드러운 조명이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2. 핀란드 헬싱키의 지하철역. 핀란드인들은 주황색같이 다루기 어려운 컬러도 감각적으로 잘 소화해낸다. 3. 예술품으로 꾸며진 스웨덴 스톡홀름의 지하철역. 4. 핀란드 헬싱키 공항의 내부 모습. 파란색과 노란색의 안내판이 눈에 잘 들어온다. 탑승구 데스크의 커다란 숫자는 누구나 쉽게 탑승구를 찾을 수 있게 해 준다
1. 덴마크의 코펜하겐 공항. 원목마루와 부드러운 조명이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2. 핀란드 헬싱키의 지하철역. 핀란드인들은 주황색같이 다루기 어려운 컬러도 감각적으로 잘 소화해낸다. 3. 예술품으로 꾸며진 스웨덴 스톡홀름의 지하철역. 4. 핀란드 헬싱키 공항의 내부 모습. 파란색과 노란색의 안내판이 눈에 잘 들어온다. 탑승구 데스크의 커다란 숫자는 누구나 쉽게 탑승구를 찾을 수 있게 해 준다
북유럽 공항들의 가장 큰 특징은 빛을 정말로 잘 다룬다는 점에 있다. 북유럽 사람들은 지리적으로 춥고 어두운 곳에 살면서 빛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고, 그것을 창의적으로 이용하게 됐다.

덴마크 코펜하겐 국제공항은 원목 마루와 부드러운 조명을 통해 무척이나 따뜻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공항 곳곳에 미니멀하고 아름다운 디자인 조명을 배치한 것도 인상적이다. 핀란드 헬싱키 공항은 탑승구의 리셉션 데스크에 조명을 넣은 커다란 게이트 번호를 설치해 놓았다. 그 자체의 디자인적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멀리서 보더라도 누구나 탑승구를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한 배려가 돋보인다. 눈에 잘 띄는, 푸른색과 노란색의 안내판들도 여행자들의 수고를 덜어준다. 게다가 헬싱키 공항의 안내판들은 내가 그동안 가 본 세계 어느 공항보다 직관적이고 아름다운 픽토그램(그림문자)을 갖추고 있다. 글자를 몰라도 이용에 전혀 불편이 없을 정도다.

코펜하겐 공항은 터미널 벽을 광고판이나 포스터 대신 예술 작품으로 채워 여행자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탑승구로 향하는 복도에서 강렬한 색상의 디자인 작품을 만나거나 덴마크의 자랑인 ‘로열코펜하겐’의 타일 아트로 꾸며진 화장실 벽에서 유명 디자이너의 사인을 발견하는 감동은 무척 크다. 그 타일들은 모두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색을 칠해 구운 것이다.

○ 지하철, 깔끔한 단순미

지하철을 보면 그 나라의 디자인을 읽을 수 있다. 런던 지하철은 어딘가 모르게 영국 냄새가 나고, 도쿄 지하철은 항상 일본스럽다. 스톡홀름의 파란 지하철은 그 형태와 색상, 디테일한 구조가 무뚝뚝하면서도 세련된 스웨덴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고, 주황색의 헬싱키 지하철은 감각적이고 과감한 디자인이 역시 핀란드답다는 감탄을 하게 만든다. 핀란드인에겐 주황색같이 다루기 어렵고 난해한 색상을 감각적으로 사용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단출한 구조의 주황색 지하철 객차에 들어서면 역시나 짙은 주황색인 플라스틱 의자의 감각적인 디자인에 시선을 빼앗긴다.

북유럽의 지하철은 단순하다. 10개 내외 또는 그 이상의 노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서울이나 도쿄, 런던의 그것과는 다르다. 스톡홀름 지하철은 단 세 개의 라인으로 이뤄져 있고, 헬싱키에는 겨우 21.1km밖에 안 되는 Y자 형태의 노선이 있을 뿐이다.

스톡홀름 지하철에는 플랫폼마다 노선도를 그려 넣은 기둥이 하나씩 있다. 재미있는 것은 열차가 이미 지나온 역들은 바탕색을 덧칠한 듯 흐리게 표시돼 있다는 점이다. 승객이 진행 방향을 굳이 찾지 않아도 되는, 효과적이고 재미있는 방식이다.

스톡홀름 지하철은 1950년에 개통됐다. 모든 역이 저마다 다른 주제와 디자인적 특징을 가진 게 매우 인상적이다. 그래서 지하철 역사에서 마치 거대한 미술관 전시실을 둘러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2년쯤 전에 출장차 스톡홀름을 찾은 적이 있다. 마침 내가 내린 지하철 역사에서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스웨덴 사람들답게 공사장 가림막을 일종의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그중 예전 스웨덴을 대표하던 화가, 디자이너, 예술가들이 직접 철로로 내려가 작업을 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들은 디자인을 통해 일반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자는 구호 아래 지하철역 미화 작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개인의 명성을 떠나 직업에 대한 소명과 사회적 책임에 충실하고자 했던, 신이 준 재능을 세상을 위해 쓰고자 했던 그들의 행동이 놀라웠다.

참, 여담이지만 북유럽 도시들엔 지하철을 놓칠까봐 뛰어가거나 서두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스톡홀름의 경우 역과 역 사이의 간격이 1분 정도에 불과하고 배차간격 역시 3분이 채 되지 않기 때문이다.

○ 버스터미널, 환경 친화


닐스에릭손 버스 터미널은 스웨덴 예테보리에 있다. 스웨덴의 발명가이자 엔지니어였던 닐스 에릭손을 기념한 건물로, 노르웨이 건축가인 닐스 톱의 작품이다. 이 건물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사용자와 환경, 디자인을 모두 배려한 이상적인 건물이란 점에 있다.

우선 이 터미널을 이용하는 승객들은 비바람이 부는 날에도 옷에 물 한 방울 묻힐 염려가 없다. 비행기 탑승구를 닮은 승차장 덕분이다. 닐스 톱은 비행기에 탈 때의 편리한 경험을 버스 승객들에게 주고 싶었다고 한다.

대도시에 어울리지 않게, 닐스에릭손 터미널은 단층 건물이다. 이것이 시내 중심에 조금의 땅이라도 있으면 빌딩을 올려 수익을 내고 싶어 하는 한국인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더 높고 넓게 지을 필요가 없어서’란다. 이는 스웨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라곰’(lagom·적당히, 이 정도면 충분히)이란 게 반영된 결과다.

터미널 건물은 친환경적이기도 하다. 조명으로 자연 채광을 이용한다. 일부 콘크리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 햇볕이 좋은 낮 시간에는 별도의 조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밤이나 어두운 날에는 등을 켜지만 이 또한 은은하게 빛이 퍼지는 간접조명 방식을 이용해 이용객들에게 편안한 느낌을 준다.

유리로 된 터미널은 거대한 온실 역할을 하기도 한다. 건물 안에 심어진 나무들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산소를 제공하고, 자칫 삭막해지기 쉬운 회색 콘크리트 건물에 넘치는 푸른 생명력을 준다. 터미널 안의 모든 상점은 고급스러운 목재로 만들어진, 같은 크기와 디자인의 박스들로 내부를 꾸몄다. 이런 인테리어는 같으면서도 다른, 묘한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이번에 북유럽에서 만난 사람들 중엔 자신의 생활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바로 디자인이라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누군가는 유모차나 휠체어가 더 쉽게 지나갈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춘 것을 좋은 디자인이라 말했고, 다른 누군가는 공중화장실의 열기 편한 손잡이나 찾기 쉬운 전차의 정지 버튼을 디자인이라 일컫기도 했다.

그들의 말에는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우리가 열광하는 북유럽 디자인들도 알고 보면 모든 사람을 편하고 즐겁게 한다는 기본적 원칙에 충실한 것들이니까. 인간을 가장 먼저 배려한 디자인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덴마크·스웨덴·핀란드=안지훈 디자인 마케터 helsinki@plus-ex.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