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순간]소프라노 신영옥의 ‘나의 엄마’… “디바야 너는 내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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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15일 0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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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서 속삭이는 어머니

신영옥은 사진보다 실물로 볼 때가 훨씬 매력적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개관 기념 콘서트를 마치고 7일 만난 그는 사진 촬영을 정중히 고사했다. 이 사진은 2008년 ‘여성동아’ 와 인터뷰할 때 찍은 것이다. 동아일보DB
신영옥은 사진보다 실물로 볼 때가 훨씬 매력적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개관 기념 콘서트를 마치고 7일 만난 그는 사진 촬영을 정중히 고사했다. 이 사진은 2008년 ‘여성동아’ 와 인터뷰할 때 찍은 것이다. 동아일보DB
《 새벽녘 베개를 끌어안고 안방으로 갔다. 나란히 자고 있는 엄마 아빠 사이를 비집고 들었다. 흠칫 잠이 깬 부모님이 어리둥절해하다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내줬다. “아유, 엄마, 나 왜 이러냐. 아기처럼.” 멋쩍게 한마디하고 잠이 들었다. 1992년 4월, 몇 년 만에 돌아온 한국. 신영옥(51)은 엄마가 곁에 있어도 엄마가 그리웠다. “엄마, 엄마” 하며 서른을 갓 넘긴 처녀가 엄마에게 몸을 기댄다, 가슴에 머리를 박는다, 팔짱을 낀다, 갖은 애교를 떨었다. 이상한 예감이라도 들었던 걸까. 며칠 뒤 그는 공연을 위해 멕시코로 떠났다. 몸이 성한 엄마를 본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
○ 디바를 부탁해, 엄마

엄마 김정숙 씨(1993년 작고)에게 신영옥은 언제나 ‘우리 영옥이’였다. 미취학 아동들로 구성된 KBS 애기노래회에 호평을 받으며 최연소로 입단한 네 살 때, 엄마는 직감했다. 자신이 다하지 못한 성악의 꿈을 이뤄 줄 막내딸. ‘우리 영옥이 목소리는 최고야.’ 영옥은 KBS 어린이합창단, 리틀엔젤스를 거치며 노래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 하는 솔로(독창자)를 도맡았다. 찬사가 이어졌다. 엄마의 꿈은 커져만 갔다. 엄마는 자신의 모든 걸 딸에게 걸었다.

언니가 둘이었지만 엄마에게는 그만이 금지옥엽(金枝玉葉)이었다. 두 언니가 고무신을 신을 때 그는 구두를 신었다. 두 언니가 시장 옷을 입을 때 그는 양장점에서 맞춘 아동복을 입었다. 다섯 살 위의 큰언니도 성악을 공부했지만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엄마의 야단을 맞으며 레슨비를 타갔고, 그는 어여쁨을 받으며 배웠다. 큰언니가 “그럼, 난 어디서 주워 온 자식이야?”라고 울며불며 해도 엄마는 “영옥이처럼 잘해야지”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영옥이 연습을 열심히 할 때 가장 흡족해했다. 밥을 먹지 않아도 진짜 배가 부르다고 했다. 어린 영옥도 엄마가 좋아하면 할수록 신이 나서 노래를 했다. 마루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하고 가곡을 부르면 안방에서 문을 열어놓은 채 듣고 있던 엄마는 “잘한다”며 추임새를 넣었다. 영옥은 안방 쪽을 흘깃흘깃 보면서 엄마가 더 즐거워하길 바라는 마음에 아직은 버거운 오페라 아리아도 불렀다.

끔찍이 그를 아낀 만큼 엄마는 관리에도 신중하고 엄격했다. 등하교 시간과 성악을 배우는 시간, 집에 오는 시간은 칼같이 지켜야 했다. 이성 교제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냈다. 목과 몸에 좋다는 음식이 항상 상에 올랐다. 주위에서는 ‘극성 엄마’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채찍질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성적이고 꽁하기 잘 하는 영옥과 티격태격한 뒤 화해의 손을 내미는 쪽은 십중팔구 털털한 엄마였다. 한 번은 잔뜩 삐친 영옥이 방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엄마는 “영옥아, 너 입고 싶은 옷 있지. 엄마가 사줄게” 하며 얼렀다. “없어” 하며 불퉁스럽게 몇 번 거절하다 마지못한 듯 방을 나왔다. “그런데 엄마를 따라 나가면 더 화가 나는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건 하나도 안 사주고 엄마가 사고 싶은 것만 사는 거야. 나, 원 참….”

엄마가 발견하고 열어준 성악의 길을 꾸준히 걸었지만 다른 길을 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 중학교 때는 무용을, 미국 줄리아드음악원을 다닐 때는 뮤지컬이 무척 하고 싶었다. ‘뮤지컬을 하겠다고 하면 엄마가 속상해하겠지, 엄마가 기절할 정도로 놀랄 거야.’ 이런 반항심으로 가득한 때였다. 하지만 가슴속으로 끙끙대기만 하다 끝내 말은 못했다. “제가 이기겠어요, 엄마가 이기겠어요? 아휴, 엄마가 안 해주면 저는 거지예요. 아무것도 못했으니까요.” 부모를 이기지 못하는 자식도 있었다.

○ 파바로티와의 공연 못보고 떠난 엄마

“얘, 얘, 가만있어 봐. 어제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두 분 돌아가셨어. 딴 사람들은 죽어 나가는데 나는 괜찮아.” 1993년 1월, 수화기에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의외로 활기찼다. 엄마는 그 전해, 간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다. ‘진짜 기적이라는 게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그해 5월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미국 메트로폴리탄오페라(메트)의 ‘사랑의 묘약’ 공연에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가겠다”고 했다. 영옥이 당대 최고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처음 호흡을 맞추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엄마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공연 한 달 전, 엄마는 세상을 떴다. 세계 성악가들이 선망하는 메트에 딸을 올려놨지만 딸이 그 무대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엄마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엄마가 없었다면 글쎄…, 제가 뭘 했을까요. 아버지가 섭섭해하시겠지만 엄마가 그렇게 안 해주셨다면 제 성격으론 안 됐을 거예요. 저는 ‘다음에 할게’ ‘천천히 하지 뭐’ 항상 그랬거든요.”

줄리아드음악원과 대학원을 졸업한 1980년대 후반에도 영옥은 콩쿠르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자신의 노래에 만족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고 ‘다음에 하지’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 그를 밀고 끌어 콩쿠르에 도전하게 한 것도 엄마였고, “이제 그만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한 것도 엄마였다. 모순처럼 보이는 두 모습 다 엄마의 진심이었을 게다.

영옥은 줄리아드를 가기 전 이미 선화예고의 우상이었다. 많은 이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미국에 왔기에 그냥 졸업만 하고 돌아간다면 아쉬움이 컸을 터다. 반면 1979년부터 시작된 타지 생활은 10년째로 접어들었다. 엄마는 거의 매일 국제전화를 하고 카세트테이프에 당부 사항을 녹음해 보내며 신경을 썼지만 막내딸이 애틋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한국에서 결혼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정상적인 여자의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때 영옥은 엄마 생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를 ‘이겼다’. “메트 오디션이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30세 이상은 참가 자격이 없는 메트 오디션이었기 때문에 29세였던 1990년이 마지막 기회였다. 죽을 각오로 임했다. “다른 거는 모르겠고, 엄마한테, 아버지한테 너무 미안했어요. 너무너무 정성을 쏟으셨으니까. 그게 미안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돼야겠다고 했죠.” 그렇게 영옥은 메트의 디바가 됐다. 엄마는 신영옥의 인생을 바꾼 인물이 아니라 ‘만든’ 사람이었다.

○ 신영옥의 자리

외국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엄마가 갖고 싶어 하던 지갑, 가방이 눈에 들어올 때가 많다. ‘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 사드렸네.’ 엄마 생각이 간절해진다. 영옥은 엄마가 돌아가신 뒤 10년을 넘게 틈만 나면 울었다. 삶의 버팀목이었던 엄마는 꿈에도 자주 나타났다.

그때마다 스승 클라우디아 핀차의 말을 되새겼다. “자신을 수녀라고 생각하라. 그 정도로 너를 희생하지 않으면 훌륭한 성악가가 되기 힘들다.” 목에 해로운 것은 입에 대지 않고, 몸이 피곤해지는 파티도 삼갔다. 힘이 들었지만 나중에는 그런 삶이 몸에 배었다. ‘성악가 신영옥’의 자리를 부단히 만들어 갔다.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 설 수 있게 됐는데 엄마는 이 세상에 안 계시네요.”

미국에서 그의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는 회계사는 종종 말한다. “왜 이렇게 자잘한 청구서가 많이 날아오는 겁니까?” 노숙인, 환경미화원, 소아당뇨병 환자 등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을 돕는 단체들의 기부금 용지다. 생전에 남모르게 어려운 이웃을 돕던 엄마는 말했다. “네가 이루는 건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네 달란트(능력)가 항상 남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해다오.” 영옥은 다시 엄마가 그립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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