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핫 이슈]뱅크런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6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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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역사의 골칫덩이… 주범은 언제나 ‘정보 부재’

최근 저축은행 부실이 불거지면서 ‘뱅크런(bank run)’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렇지만 뱅크런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전 세계 금융계를 괴롭혀 온 현상이다. 미국 금융 역사상 가장 유명한 뱅크런은 약 100년 전에 발생했다.

1907년 10월 22일 화요일 오전 9시. 미국 뉴욕 시 5번가와 34번가가 교차하는 서북쪽 모퉁이에 자리 잡은 ‘니커보커 트러스트(Knickerbocker Trust)’의 커다란 청동문 앞에 100여 명이 몰려왔다. 대부분 상점주인과 기계공, 점원들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예금을 찾기 위해 초조하게 기다렸다. 한 시간 뒤 정규 영업시간이 시작됐고, 당시 뉴욕에서 세 번째로 큰 신탁회사였던 니커보커 트러스트의 청동문이 열렸다. 남자들은 한 줄로 섰고, 여자들은 큰 출입구 왼편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1907년 금융공황’을 촉발시켰던 뱅크런은 그렇게 시작됐다.

뱅크런은 은행에 돈을 맡긴 사람들의 예금 인출이 대규모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은행에 돈을 맡긴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악몽’은 예금한 돈을 돌려받지 못하는 것. 예금자들은 은행이 부실하다는 소문이 돌면 그 은행이 파산하기 전에 다른 사람보다 먼저 돈을 찾기 위해 잽싸게 발걸음을 옮긴다.

○ 사장의 자살로 이어진 뱅크런

니커보커 트러스트의 직원들은 빠르게 손을 놀렸다. 이자를 계산하고 서류에 도장을 찍어 곧바로 예금자에게 돈을 내줬다. 워싱턴포스트는 “1000달러씩 묶어 놓은 초록색 현금 뭉치가 출납직원 옆 카운터에 높이 쌓여 있었다. 돈뭉치가 하나씩 빠져나갔고 돈 더미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직원들은 이따금 금고에서 한 아름씩 지폐를 가져와 장작더미처럼 쌓아올렸다”고 당시 모습을 보도했다.

문을 연 후 2시간 30분 동안 5번가와 브로드웨이, 할렘과 브롱크스 지점에서 총 800만 달러 이상의 예금이 인출됐다. 니커보커 트러스트의 중역인 조지프 브라운 씨가 예금자가 줄지어 서있는 한복판에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올라갔다. 그는 뉴욕 주 금융당국이 9월 17일 니커보커 트러스트를 조사했고 당시 회사 자산이 6888만4523달러, 부채가 6370만1531달러였다는 내용의 발표문을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낭독이 끝나자 가벼운 환호가 이어졌다. 그러나 줄을 벗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예금 지급은 계속됐다.

뱅크런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자동차와 마차가 회사 앞으로 몰려들었고, 실크 옷을 입은 여자부터 프록코트에 타이를 맨 신사까지 점점 더 많은 예금자들이 기다랗게 줄을 섰다.

결국 니커보커 트러스트의 예금 인출 사태는 미국 전역으로 번졌고, 찰스 바니 사장은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로버트 브루너 버지니아대 경영대학원 학장의 분석에 따르면, 금융 자본가 J P 모건이 뉴욕의 은행가들을 설득하고 사태를 진정시키기까지 미국 상장 주식의 가치가 37% 하락했고 최소한 25개의 은행과 17개 신탁회사가 파산했다.

○ 뱅크런에 맞선 영국은행의 ‘시간 끌기’

그보다 훨씬 앞선 1720년 9월 영국은행(Bank of England)에서도 뱅크런이 벌어졌다. 영국은행이 남해회사(The South Sea Company) 채권을 400파운드 가격으로 ‘처리해’ 주겠다는 약속을 번복하면서 은행 앞에는 길게 줄을 지어 늘어선 사람들로 넘쳐났다. 남해회사는 아프리카 노예를 스페인령 서인도 제도에 수송하고 이익을 얻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1711년 영국에서 설립된 특권 회사다. 뒤에 금융 회사로 변신했다.

금융역사가 찰스 킨들버거의 책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1978년)를 보면 뱅크런에 대한 영국은행의 대응 방법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당시 영국은행은 돈을 찾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의 맨 앞에 ‘친구’들을 배치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6펜스짜리 주화로 예금을 ‘천천히’ 지급해줬다. 돈을 찾은 친구들은 다른 문으로 들어와 그 돈을 다시 은행에 맡겼다. 은행은 주화를 받아 다시 느린 동작으로 예금을 되돌려줬다. 영국은행은 이런 방법으로 뱅크런이 끝날 때까지 버텼다. 이것은 은행이 나름대로 강구한 편법적인 자구책이었다.

영국은행뿐만 아니라 영국의 스워드 블레이드 은행도 같은 시기에 같은 방법으로 뱅크런에 대응했다. 남해회사의 후원자였던 스워드 블레이드 은행은 같은 해 9월 19일 뱅크런이 시작되자

4륜 마차 여러 대 분량의 은화를 실어와 잔돈으로 천천히 예금을 돌려줬다. 어떤 예금자는 9월 24일 은행 업무가 끝나기 바로 직전에 8000파운드를 1실링과 6펜스짜리 주화로 지급받기도 했다고 한다. 영국은행은 1745년 12월 5일 ‘검은 금요일’에 뱅크런이 발생했을 때도 25년 전처럼 6펜스짜리 주화로 예금을 지불해 주는 방법을 통해 시간을 끌며 시장의 신뢰를 회복했다.

○ 근대은행 생긴 후 끊임없이 반복

다양한 정책적 대응에도 불구하고 뱅크런은 16세기 근대적 은행이 등장한 이후부터 인터넷뱅킹으로 단 몇 초면 입출금이 가능한 21세기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2007년 9월 14일 영국에서는 140년 만에 노던록 은행에서 뱅크런이 일어났다. 오전 6시부터 영국 전역의 노던록 은행 지점 밖에 긴 줄이 늘어섰다. 은행의 상황에 대해 잘 모르지만, 텔레비전 뉴스에서 혹은 지나가다가 긴 줄을 보고 대열에 합류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50대의 한 회계사는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난 사정을 잘 안다. 사실 여기 올 필요는 없었다. 내 머리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가슴은 다른 말을 한다”고 밝혔다. 블룸버그는 90세의 아버지와 함께 노던록 은행 브라이튼 지점 밖에서 기다리던 앤 버크 씨의 말을 전했다. “혼자만 빠지고 싶진 않다. 만약 모든 사람이 한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 된다.”

최근 뱅크런이 일어난 한 저축은행 지점을 찾았던 문모 씨(71·여)는 “4000만 원을 넣어 두었다. 5000만 원 이하는 법이 보장해 준다는 사실을 알지만 걱정되기는 마찬가지다”라며 좀처럼 은행을 떠나지 못했다. 박모 씨(55·여)도 “가지급금 2000만 원을 먼저 받아도 나머지 돈을 받기까지 시간이 걸리니 불안하다”고 밝혔다.

이렇듯 뱅크런의 핵심은 여전히 사람들의 ‘불안함’에 있다. 그렇다면 불안함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정보의 부족’ 때문이다. 은행 부실에 대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상황에서는 작은 뉴스라 해도 그에 따라 판단해보고 돈을 인출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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