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Life]유명인의 평범한 순간을 잡은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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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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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진가가 잡지사 요청으로 고 최진실 씨를 촬영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없던 최 씨는 “스튜디오에 못 가니 방송국에서 보자”고 했단다. 방송국에서 만난 그녀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밝은 미소를 몇 번 지어 보이더니 “다 됐죠?” 하며 불과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내가 그 사진을 보니 ‘과연 그 여배우답게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수많은 CF에서 보여준 그 스테레오타입의 웃음이 사진 속에 있었다.

누구나 사진을 찍는 시대가 됐다. 하지만 누구나 카메라 앞에 서면 그것을 의식한다. 눈을 크게 뜬다든지 머리를 뒤로 넘긴다든지 말이다. 아무튼 평소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기란 참 힘들다. 더구나 수만, 혹은 수십만 명이 볼지도 모르는 대중매체에 실릴 사진이면 오죽할까. 최 씨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배우와 모델은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전문가다. 그들은 실제의 자기가 아닌, 대중이 원하는 모습을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 해맑은 웃음 또는 우아한 모습 뒤의 시련이나 고통, 또는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좀처럼 드러나는 법이 없다.

○ 유명 인물을 일반인으로 만들다

에드워드 스타이켄, 유수프 카르시 등 20세기 사진가들이 만든 인물사진 양식은 한스 홀바인 같은 15세기 인물화 대가들이 만든 엄격한 예술적 전통을 따른 것이다. 그 핵심은 대상을 평범한 사람 이상으로 포장하고 이상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양식을 신문과 잡지의 인물사진에서 수없이 보아 왔다. 그 양식에 따라 인물은 신격화되고 영웅으로 만들어지며 여신이나 요정으로 변신한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흥미로운 존재로 업그레이드된다. 따라서 그들의 솔직한 모습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극적인 표현도 오래 지속되면 지루하고 진부해진다. 특히 이른바 예술정신을 가진 이들은 이런 양식화된 틀을 깨지 못해 안달이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는 유르겐 텔러(독일에서 태어났으나 영국에서 주로 활동)는 비전통적 방식으로 인물사진을 찍는 사진가다.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대상은 대부분 유명 인사들이다. 하지만 그냥 평범한 이웃 주민이거나 내가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주변 인물처럼 보인다. 인물의 이상화는 고사하고 평소 모습보다 더 못하게 찍은 것 같기도 하다.

영국 아티스트 데이비드 호크니를 찍은 사진을 보라. 그는 남루해 보이는 집 안의 의자에 담배를 물고 누워 있는데, 담뱃재가 옷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다. 옆에 가서 재를 털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들 정도다. 팝아트의 대가인 리처드 해밀턴 역시 그냥 할아버지로 보인다. 예술가를 찍은 인물사진은 대개 그의 예술혼을 담고자 하는 흔적이 역력한데, 해밀턴을 찍은 사진에는 예술혼은커녕 순진해 보이는 시골 노인이 한 명 있을 뿐이다. 패션 디자이너 비비언 웨스트우드의 누드 사진은 충격적이다. 올해 70세인 이 할머니는 상식적으로는 결코 누드사진의 모델이 될 수 없다. 그녀의 누드는 문화비평가 존 버거가 지적한 ‘남들에게 보이도록 진열된 누드, 즉 의상의 한 형태인 누드’가 아니다. 위장하거나 포장하지 않은 ‘벌거벗음’이다.

○ 예쁘지 않게 찍는 패션 사진

텔러풍의 사진이 우리나라에선 낯설지 모르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이상화하지 않은 인물, 일상 속의 벌거벗은 몸을 다룬 사진이 보편화된 지 오래다. 독일계 미국 사진가 위지는 1945년 ‘벌거벗은 도시’라는 사진집을 냈다. 그는 아름다운 도시 뉴욕을 비정하고 냉혹한 시선으로 담아 충격을 던져주었다. 플래시를 터뜨린 그의 사진은 정제되지 않았지만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열어줬다. 이런 거친 다큐멘터리 사진 기법은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하나의 양식을 만들었고, 인물사진에도 영향을 줬다. 다이앤 아버스, 낸 골딘 같은 여성 사진가들도 전통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기괴한 이미지, 꾸미지 않은 솔직한 일상 사진으로 독특한 미학을 구축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그런 거친 사진들이 대상을 최대한 예쁘고 매혹적으로 포장하는 패션 사진에도 거침없이 침투하기에 이르렀다. 텔러와 함께 그 길을 개척한 또 다른 사진가는 테리 리처드슨이다. 그도 텔러처럼 특별한 조명 세트를 사용하지 않고 자동카메라에 달린 조그만 플래시를 터뜨려 사진을 찍곤 한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는 모델 뒤로 플래시 그림자가 나오고, 아마추어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플래시 반사로 빨갛게 된 모델의 눈을 흔히 볼 수 있다. 플래시로 얼굴이 번들거린다든지 노출 과다인 사진도 많다. 프로 사진과 아마추어 사진의 가장 큰 차이는 어쩌면 조명과 필름 크기의 차이에서 오는 건지도 모른다. 정교하게 세팅된 조명과 큰 필름이 이미 사진의 풍성함과 예술성을 보증해준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그런 걸 다 포기한 채 카메라 하나만 달랑 들고 사진을 찍는다. 도대체 뭘 믿고 그럴까?

○ 내면과 영혼을 담은 사진이란?

사진가라면 누구나 인물의 내면과 영혼을 담고자 노력한다. 사진은 125분의 1초 안팎의 극히 짧은 순간의 표정을 담는다. 그래서 사진가들은 그 짧은 순간에 혹시 대상의 내면과 영혼, 또는 정수를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셔터를 누르고 또 누른다. 한 컷의 인물 사진을 위해 보통 여러 통의 필름을 쓴다. 그렇게 해서 나온 하나의 A컷이 미디어에 노출된다. 그런데 과연 그 사진 속에 인물의 내면과 영혼이 담긴 것인가? 사실 알 수 없다. 사람의 표정은 매 순간 바뀌는데 어떤 표정은 그가 아니고, 어떤 표정은 그의 내면이고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히려 카메라 앞에서 지은 의식적인 몸짓과 표정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게 아닌가?

리처드슨은 스튜디오에 들어서면 요란스러운 행동을 해 모델의 긴장을 풀어주는 사진가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든 모델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텔러는 인물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무방비 상태가 된 바로 그 순간을 찍는다. 그 순간은 인물이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을 연기할 때다. 평론가 에리크 트롱시는 이렇게 말한다. “텔러는 대상 인물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아닌, 그 인물 자체를 표현해 낸다. 그의 첫 작품은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촬영 대상은 주어진 캐릭터를 연기해내는 데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캐릭터 연기 과정에서 스스로의 가장 자연스러운 본질을 감추는 데 익숙해진다.” 텔러는 이런 사람들의 ‘기름기’를 걷어내고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텔러는 올해 4월 자신의 전시를 위해 한국에 와서 배우 원빈을 찍었다. 그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두 번이나 봤고, 마크 제이컵스의 모델로 기용하고 싶을 정도로 원빈에게 반했다고 한다. 그가 찍은 원빈의 사진은 패션 잡지 ‘보그’에 실렸다.

‘보그’에 나온 사진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원빈의 모습이자 지금까지 결코 볼 수 없었던 패션 잡지의 화보다. 특히 첫 두 쪽에 실린 사진은 패션 화보 촬영이 모두 끝나고 원빈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채 어떤 꽃집을 둘러보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찍은 것이라고 한다. 이 사진에서 그의 눈은 여전히 우수어린 미소년의 그것이지만, 인물이 신비롭게 보이도록 쓸고 닦고 만진 흔적이 없다. 그리하여 광고나 화보 사진 특유의 반짝거림과 기름기가 완전히 제거돼 있었다. 이는 낯설지만, 우리에게 새로운 양식과 미학의 가능성을 깨닫게 해준다.

김신 디자인 저널리스트 kshin2011@gmail.com

김신 홍익대 예술학과를 나와 월간 ‘미술공예’를 거쳐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이후 월간 ‘디자인’에서 2011년 2월까지 16년 8개월 동안 에디터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현재 온·오프라인 매체를 아우르며 디자인 저술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김신 디자인 잡문집’ ‘디자인의 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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