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인터뷰]내인생을 바꾼 사람 조윤선 의원의 미국이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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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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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뉴요커의 평정심 보고 난, 가치관을 다시 썼다.

수호초로 뒤덮인 벽 앞에 선 조윤선 의원이 자신을 변화시킨 10년 전 미국 연수생활을 떠올리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수호초로 뒤덮인 벽 앞에 선 조윤선 의원이 자신을 변화시킨 10년 전 미국 연수생활을 떠올리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브렌다, 기억 나요?

그날, 2001년 9월 11일 그날 말이에요. 뉴욕 맨해튼 거리가 엑소더스 하듯 어디론가 황망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대중교통은 모두 멈춰 섰던 그날. 난 당신 딸 조지나와 내 큰아이를 학교에서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어요. 학교에 들르기 전 황급히 은행에서 200∼300달러나마 현금으로 뽑아놨고, 슈퍼마켓에서 물도 큰 통으로 네댓 개 사서 부엌에 쟁여놓았고요.

당신은 그날 밤이 이슥해진 무렵에야 애를 데리러 왔어요. 걸어서 올 수밖에 없었던 걸 감안해도 좀 늦었죠. 이유를 설명하는 당신 말을 듣고 난 망치로 한 대 맞은 듯했어요. “머리를 잘라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미용실에 들렀어요.” 또 생수통을 보곤 “윤선, 물을 저렇게 많이 살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요”라고 했지요. 그리곤 말을 이었어요. “테러를 이기는 가장 바른 길은 일상(normal life)을 유지하는 거라는 말, 맞는다고 생각해요. 공포에 떨면 테러에 굴복하는 거니까요.”

그 순간이었을 거예요. 당신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런 사회의 힘을 느낀 건. 번개에 맞은 듯 찌릿하게 온몸을 관통하던 전율을 나는 지금도 기억해요.

○ 사람들이 나를 바꾸다

6년 반의 로펌 변호사 생활 끝에 찾아온 미국 연수 기회를 맞아 조윤선 한나라당 의원(45)이 결심했던 건 단 하나였다. ‘나를 좀 바꿔 보자.’ 착하고 공부 잘하던 여학생. 그래서 학교와 집, 고시공부, 직장과 집밖에 몰라서 경험도 일천했던 자신. 소극적이고 사색을 좋아하던 자신을 적극적이고 외향적으로 바꿔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두 번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두 번, 세 번 생각하다 아무것도 못한 적이 대부분이었거든요. 한 번만 생각한 뒤 뭐든지 해보자고 이를 악물었죠.”

2000년 7월부터 2002년 4월까지였다. 가볼 생각도 못하던 야구장, 농구장에 미식축구 경기까지 보러 갔다. 미국에 같이 온 큰아이의 학교 친구 엄마 브렌다 볼트우드와 친해진 것도 그랬다. 코네티컷에 있는 자기 친구네 집에 놀러가지 않을래, 묻던 브렌다에게 냉큼 “그래” 하고는 짐을 챙겼다. 뉴욕 스케이트장에서 만난 50대 부부가 건넨 e메일 주소로 몇 차례 안부를 교환하다 초청을 받고는 200km가량 떨어진 그 부부의 집을 향해 무작정 기차에 올라탄 것도 그랬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었다. 그저 자기 성격을 한번 바꿔보자고 했을 뿐인데 그렇게 만난 사람들이, 그렇게 겪게 된 에피소드들이 조윤선이라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바꿔놓았다.

스케이트장에서 만난 무니(Mooney) 부부는 뉴욕 주 주도인 올바니에서 서남쪽으로 20여 km 떨어진 델마라는 작은 마을에 살았다. 남편은 제너럴일렉트릭(GE)에 다니고 아내는 시 보건 공무원이었다. 전형적인 중산층 부부인 그들에게는 생후 7개월째에 입양한 한국인 딸이 있었다. 아내 쥬디는 딸아이를 위해 영어로 된 한국음식 요리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한국의 설이 되면 직접 요리한 불고기며 잡채 같은 요리를 싸들고 아이의 학교를 찾았다. “우리 딸이 태어난 나라에선 오늘 같은 날이면 이런 요리를 먹어요”라며 반 아이들과 선생님에게 베풀었다. 인구 9000명이 안 되는 델마에서 그 딸아이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나를 초청한 것도 그 아이를 위해서였어요. 그렇다고 그 부부가 과시하거나, 베푸는 게 과하지도 않았어요. 그저 자신의 아이를 위해 마음을 쓰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미국 중산층의 박애정신을 봤다고 해야 할까요.”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무너지던 날 오후, 물을 사러 들렀던 슈퍼마켓에서의 경험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평소보다 사람이 좀 많다고 느끼고 있는데 판매대에 생수가 바닥났다. ‘그래, 미국인들도 어쩔 수 없지. 사재기를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점원이 사정을 설명했다. “(슈퍼마켓) 주인이 사고 현장에 필요할 것 같아서 남아 있는 생수를 트럭에 싣고 갔다”는 것이었다. 잠시 감탄을 하는 동안 생수는 다시 공급돼 판매대에 올랐다.

잊을 수 없는 멘터, 미셸 판사

1년 동안의 법학전문대학원 공부를 마친 뒤 조 의원은 워싱턴 연방항소법원에서 4개월가량 인턴생활을 했다. 공무원 관련 사건, 무역 및 특허 분쟁을 다루는 이 법원은 종신판사 12명으로 구성된다. 판사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젊은 법조인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침 조 의원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이런 시간이 돌아왔다. 후에 법원장을 맡게 되는 폴 미셸 판사가 좌장을 맡는 날이었다.

미셸 판사가 입을 열었다. “어떤 조직에 들어가든 개인과 조직의 이해관계는 상충되기 마련입니다. 조직은 개인을 부품처럼 쓰지요. 현명한 사람은 조직과 자신의 이해관계를 잘 조정할(align) 줄 압니다.”

조 의원의 머릿속이 갑자기 환해졌다. 이 말을 7년 전에 들었더라면…. 자신이 7년 전 로펌에 입사해서 한동안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로펌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데다 고교 선배도, 대학 선배도 없는 곳에서 ‘중요한 사건은 남성 변호사가 다 맡고, 난 허드렛일만 하는 거 아닌가’라는 피해의식만 커졌다. ‘내가 잘하지 못하면 앞으로 여성 변호사가 들어오기는 더욱 힘들겠다’는 부담도 작지 않아서 마음고생을 꽤 했다. 만약 저 말을 일찌감치 들었더라면 마음고생 덜 하고 꿋꿋이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눈물이 나오려 했다.

미셸 판사의 조언이 이어졌다.

“자기 수입보다 겸손하게 생활하세요. 변호사 월급 받으면 대출받아 집 사고, 고급차 사려는 욕심이 생깁니다. 그렇게 해서 대출금 갚다 보면 나중에 국가에서 공직을 제안하더라도 선뜻 나서질 못합니다. 공무원 월급으로는 빚을 갚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내가 나와 가족 이외에 내가 속한 사회나 국가를 위해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늘 돌아보세요. 그리고 언제나 멘터를 찾으십시오. 마음껏 이야기를 들으세요.”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다. 자기보다 대여섯 살은 어린 미국인 인턴들 앞에서 울기는 싫었다. 하지만 감동이 뭉게뭉게 가슴 속을 채웠다. 그동안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고교에서도, 대학에서도, 사법연수원에서도….

“아, 미국을 움직이는, 소리 없는 리더들은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묵중한 충격이 왔지요. 공직이라는 걸 다시 생각해 보게 됐어요. 단지 경력(career)이 아니라 봉사(service)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지요.”

○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2년이 채 안 되는 미국 생활에서 조 의원이 만나고 경험한 사람과 사건이 유쾌했던 것만은 아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효율적인 상황도 겪었고, 시간만 때우면 된다는 식으로 일하는 공무원이나 회사원도 심심치 않게 만났다. 하지만 모두 타산지석이 될 일이었다.

조 의원은 말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들을 만나면서 왜 미국 사회가 견고하게 움직이는지 알게 됐어요.” 한 나라가 강하다는 건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 미국을 단순히 동경하지 말고, 그런 사람들이 있는 사회를 부러워해야 한다는 것. 미국 생활은 그런 것들을 알게 해 줬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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