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정 양립하려면 기업 설득하라” 백희영-안철수 대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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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27일 1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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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영 여성가족부 장관(오른쪽)이 22일 서울 중구 여성가족부 청사에서 안철수 KAIST 교수와 대담을 했다. 두 사람은 “가족과 청소년이 행복해야 사회 전체의 행복지수가 높아진다”고 입을 모았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백희영 여성가족부 장관(오른쪽)이 22일 서울 중구 여성가족부 청사에서 안철수 KAIST 교수와 대담을 했다. 두 사람은 “가족과 청소년이 행복해야 사회 전체의 행복지수가 높아진다”고 입을 모았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여성부가 가족과 청소년 업무를 맡으면서 여성가족부로 확대된 지 19일로 1년. 백희영 여성가족부 장관은 지난 1년을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미래사회에 맞는 정책을 논할 대담자로 안철수 KAIST 석좌교수를 직접 섭외했다.

안 교수는 22일 서울 중구 여성가족부 청사를 찾아 백 장관과 마주 앉았다. 백 장관은 "안교수가 함께 일하고 싶은 최고경영자(CEO), 청소년이 멘토로 삼고 싶은 사람 1위이기 때문에 여성가족정책의 방향을 조언해 줄 수 있다고 기대했다"고 초청 이유를 설명했다. 백 장관과 안 교수는 과학을 공부했고 교수라는 공통적인 배경이 있어서인지 서로 할 말이 많았던 듯했다. 대담은 기자가 타이핑을 하기 벅찰 만큼 빠르게 이어졌다.

●정부 기업이 미래 준비하려면 여성고용 늘릴 수밖에 없어

백 장관은 한국의 여성경제활동 참가율이 지난해 54.5%로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수준에 못 미친다는 고민을 먼저 털어놓았다.

백 장관=미래 사회를 준비하려면 여성 인력의 활용이 중요한 과제다. 저출산이 심각한 한국은 더욱 절실하다. 안철수연구소는 여성이 일하기 좋은 일터로 알려져 있는데….

안 교수=아내가 지금도 일을 한다. 처음부터 맞벌이 부부였다. 창업할 때에도 공동 창업인 3명 가운데 1명이 여성이었다. 내게는 여성이 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직접 경험해보니 여성은 조직에 대한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고 동료애와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높다. 기업가 사이에 이런 인식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백=저도 맞벌이부부다. 같이 유학하고 같이 일했다. 교수였기 때문에 직장인보다 상황이 나았을 텐데도 아이가 아프다던가 하면 정말 난감했다. 어떻게 여성 직원을 배려했나.

안=창조적인 대안이 아니라 '기본'을 지켰다. 16년 전에는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규정보다 짧게 가라고 암묵적으로 강요했다. 여성 직원이 눈치 안 보고 거리낌 없이 가도록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런 조직문화가 한 번 형성되면 CEO가 바뀌고 직원이 바뀌어도 계속 이어지더라.

●일 가정 양립 제도 성공하려면 기업 설득하라

백장관=여성가족부도 유연근무제 도입이나 가족친화기업 인증 등 일과 가정을 양립하도록 돕는 정책을 만들었다. 공공기관에서 민간기업으로 확산됐으면 하는데 속도가 더디다.

안=정보기술(IT)기업에서 일하다 보니 주변에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많다. 예전에는 한국에 돌아오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집값이 너무 비싸고 사교육비가 많이 든다며 '상위 1%' 엘리트가 한국에서 살기 힘들다고 말한다. 고급 두뇌가 한국을 떠난다는 점은 사실 기업이 가장 심각하게 느낄 것이다. 기업을 정부가 효과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요즘 사회적 책임(CSR)을 강조한다. 책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니 기업은 그저 흉내만 낸다. 비슷한 용어로 지속가능한 경영(SM)도 있다. 기업이 계속 생존하려면 어차피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기업이 스스로를 위해 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일-가정 양립 제도는 기업이 장기적으로 인재를 확보하는 전략이 될 수 있다. 이직률이 높으면 구인비용, 교육비용이 높아진다.

안 교수는 삼성을 예로 들며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대기업이 단기적인 수익만 쫓다 보니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중소기업 상생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더니 지금 부메랑을 맞고 있다. 삼성전자만 하더라도 능력 있는 협력 파트너가 있으면 혁신적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텐데 지금 한계에 부닥쳤다. 인재를 키우고 관리하는 것은 요즘 기업이 당면한 과제"라고 말했다.

백=일과 가정의 양립 제도가 여성의 경제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를 막으려면 아버지 역시 이런 제도를 이용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안=부모와 자식간에는 시간을 쓰고 관심을 보이는 만큼 관계가 발전하고 오래간다. 개인적으로 회사에 있을 때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고 유학을 떠난 후에야 함께 도서관도 가고 공부도 했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직업을 2,3가지 갖게 될 것이고 평생교육을 받아야 한다. 미래에는 '함께 공부하는 가족'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조만간 일-가정 양립제도는 아버지가 더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시기가 올 것이다.

●인터넷 게임산업 성장은 기업 몫, 부작용 방지는 정부 몫

백 장관은 "아버지와 고민을 나눈다는 청소년이 4%에 불과하다"며 아버지의 역할이 커져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그는 이어 "청소년 문제 뒤에는 가족 문제가 있다"고 우려했다.

백=국내 청소년의 인터넷 사용 문화가 특히 걱정이 된다. IT 기업가였음에도 청소년 건전문화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게 된 계기가 있나.

안=15년 전 책(별난 컴퓨터 의사 안철수)을 냈다. 산업화시대에서 정보화시대로 급격히 바뀌는데 청소년을 미리 교육시키지 않으면 부작용이 클 것이라고 누누이 말했다. 산업시대의 윤리교육은 '공공장소에서 폐를 끼치지 말라'는 내용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정보화시대에는 방에서 혼자 컴퓨터를 하다가 타인을 자살로 몰 수 있다. 인터넷이 연결된 방은 공공장소이고 컴퓨터 맞은편에 사람이 앉아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술을 쓰는 사람이 문제다. 기술에 끌려 다니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게임 중독 청소년은 인터넷, 컴퓨터 없이도 중독 성향을 보인다. 기술적인 접근은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

백=과학이 산업이 되었다면 산업계에서도 이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청소년 인터넷중독률은 12.4%로 성인의 두 배에 이른다. 하지만 '심야 셧다운제'를 담은 청소년보호법이 부처간 이견으로 이번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심한 규제라는 비판이 있어 곤혹스럽다.

안=기업도 정부도 오직 성장률이 목표다. 기업과 정부가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모습은 과거 패러다임이다. 기업은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정부는 성장의 부작용에 대한 예방책, 개선책을 내놓아야 한다. 정부가 성장에 매몰돼 모든 규제를 푼다면 어떻게 되나. 산업뿐 아니라 국가의 전 부문이 골고루 발전해야 한다. 게임산업 발전으로 인한 부작용이 있다면 정부가 나서 방지해야 한다.

이런 소신에 대해 IT 기업가 출신으로 주변에서 압력을 받지 않는지 물었다. 안 교수는 "전혀 없다"며 "도덕시험 정답만 얘기해서 그런지, 딴지를 거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가족 해체 막으려면 부모를 집에 돌려줘야

안 교수는 "이혼율, 자살율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에서 최고 수준인데 여성가족부가 이를 막기 위해 출범했다고 생각한다"며 가족해체를 막기 위한 노력을 주문했다.

백 장관은 "올해 초 가족실태조사 결과를 보니 가족의 범위를 매우 협소하게 보고 있어 놀랐다"며 "대가족이 함께 산다는 건 어렵기도 하지만 좋은 점도 많다. 실제 시댁이나 친정과 같이 사는 직장여성들은 출산율이 더 높다"고 말했다. 또 "가족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가족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야 한다"며 다시 한 번 가족친화문화 확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안 교수는 영혼을 담은 기업을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해 왔다. 정책에도 그런 철학이 적용 가능한지 물어봤다. 안 교수는 "정책을 만들어 본 적이 없어 조심스럽다"면서도 "정해진 예산에서 우선순위를 골라야 한다는 데 정부 고민이 있을 것이다. 이 때 정부가 아니라 국민을 우선순위를 해 달라"고 대답을 피해가지 않았다. 그는 또 "앞이 아니라 뒤에서 빛이 나는 일을 해 달라. 단기적인 효과보다 중장기적 효과가 있는 정책을 먼저 해 달라. 이 세 가지면 영혼이 있는 정책이 되지 않겠느냐"는 원칙을 들려줬다.

● 안교수 "현재 진행형" 백장관 "엄마보다 교수를 잘 한 것 같다"

백 장관과 안교수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다. 부모, 배우자, 교수, 장관 또는 CEO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백=이렇게 많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하나 싶은 적도 있다. 일도 생각만큼 못 하고 가정도 못 챙긴 것 같다. 내 또래들은 모두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굳이 고른다면 교수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의 70~80%는 해낸 것 같다. 당연히 잘 할 줄 알았던 엄마, 아내의 역할은 아쉬울 때가 많다. 여성부가 추진 중인 유연근무제, 아이돌보미 사업은 경험에서 비롯된 정책이다. 매순간 최선을 다하다 보면 성공에 이르지 않을까하는 신념은 갖고 있다.

안=현재 진행형이라 성공과 실패를 판단할 수 없다. 20년간 훨씬 훌륭한 분이 어처구니 없이 무너지는 장면도 많이 봤다. 성공했다고 생각한 순간, 남의 단점이 커 보이는 순간이 정점이고 이후는 내리막길이다. 2000년에 고 박완서 선생과 인촌상을 함께 받았다. 선생님은 상패를 바라보더니 "상이 아니라 벌"이라고 하셨다. 여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앞으로 더 잘 하라고 하니 얼마나 더 고생하라는 건지 한숨이 나온다고 하셨다. 그런 자세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백희영 여성가족부 장관(61)
△1974년 미 미시시피대 식품영양학과 졸업
△1981년 미 하버드대 보건대학원
△1992년~현재 서울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2009년~현재 여성가족부 장관

●안철수 KAIST 석좌교수(49)
△1991년 서울대 의대, 동대학원 졸업
△1995~2005년 안철수연구소 대표이사
△2008년 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2008년~현재 KAIST 석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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