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 개관 100일 맞아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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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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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향기 흐르자 더 짙어가는 ‘헌책의 추억’

①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는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온다. 싼값에 아이들 동화책을 사거나 대학교재를 구하려는 사람, 절판된 책을 찾는 마니아들이 골목을 구석구석 누빈다. ②책방골목과 연결된 계단 옹벽에는 ‘카멜레온의 여행’ 이라는 주제의 만화가 65m에 걸쳐 그려져 있다. ③ 개관 100일을 맞은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 부산=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①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는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온다. 싼값에 아이들 동화책을 사거나 대학교재를 구하려는 사람, 절판된 책을 찾는 마니아들이 골목을 구석구석 누빈다. ②책방골목과 연결된 계단 옹벽에는 ‘카멜레온의 여행’ 이라는 주제의 만화가 65m에 걸쳐 그려져 있다. ③ 개관 100일을 맞은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 부산=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꽃샘바람이 불었지만 달아오르기 시작한 봄볕을 막진 못했다. 햇살을 즐기며 함께 책을 고르는 장년 부부의 모습이 정겹다. 매주 한두 번 헌책방 순례를 한다는 양명수(61), 황지혜 씨(60) 부부. 헌책이 왜 좋은지 묻자 “향수 아입니꺼”라고 답한다. 부산 중구 보수동의 책방골목. 1950년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잡지를 파는 좌판에서부터 시작된 책방 거리다. 한때는 70여 개 책방이 있었다. 지금은 50개 남짓으로 줄었고, 새 책을 파는 서점도 들어섰다. 15일 오후 책방골목을 찾았다. 주중 낮 시간대라 손님이 많지는 않지만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대우서점’ 앞. ‘수학의 정석’을 사러 온 주부에게 주인이 묻는다. “아들이 문과입니까, 이과입니까. 그걸 알아야 드리지요.”》

헌책방 ‘공감’에 들어온 허모 씨(41). 1995년 웅진출판에서 나온 ‘인간 실격’이 있는지 물었다.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전집 가운데 10권을 갖고 있는 허 씨는 나머지 두 권을 찾으러 다니는 중이었다. “절판된 책 찾아내고, 헌책 모으는 게 참 재미있습니다.”

책방골목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하루 평균 2000명 이상 다녀갈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하지만 인터넷, 홈쇼핑을 통한 책 판매가 늘면서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헌책보다 싼 새 책도 나오는 현실에 계속 침체될 것만 같았던 분위기. 하지만 오랜 세월 쌓아온 뚝심은 최근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헌책을 파는’ 골목에서 ‘문화를 나누는’ 거리로 모습을 바꿔가고 있는 것.

이곳에선 9월에 진행되는 축제를 비롯해 크고 작은 문화행사가 열린다. 책방골목 번영회장을 맡고 있는 김종훈 씨(60)는 “문화를 즐기는 쪽으로 여행 풍속도가 바뀌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KBS ‘1박 2일’을 통해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도 인지도가 높아졌다.

지난해 12월 8일에는 중구가 8층짜리 ‘책방골목 문화관’을 열었다. 문화관은 연극배우의 공연을 곁들인 낭독회, 부산 지역 학자들 강연회 등을 열고 있다. 16일 개관 100일을 기점으로 문화관은 더욱 책방골목과 밀착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김연정 문화관 부관장은 “책방골목의 이미지를 높이고 책방골목에 오지 않던 사람들을 유인하는 역할을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런 노력들과 더불어 최근에는 젊은 세대가 가세하면서 책방골목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부모로부터 책방을 물려받은 2세대 주인도 있고, 아무런 인연 없는 젊은 층도 새롭게 터를 잡고 있다. 젊은 세대는 책방골목 홈페이지를 만드는 등 이제껏 없었던 시도를 하나씩 하는 중이다. 보름 전 인문사회과학 헌책을 중심으로 ‘공감’을 연 이도훈 씨(48)도 젊은 편에 든다. 책방의 내외관을 초록색으로 산뜻하게 단장한 그는 “사람들과 책을 공유하는 게 좋아 뛰어들었다”고 밝혔다.

보수동에서 가까운 고등학교를 나온 기자는 고등학생 때까지 헌 참고서를 사러 이곳에 자주 들렀다. 25년 만에 찾은 골목은 옛날과 달라진 게 없었다. 책방골목임을 알리는 조형물이 여기저기 세워졌고, 한쪽 골목에 ‘만화거리’가 조성되긴 했지만 골목의 기본 모습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고 트렌드는 달라졌다. ‘청산서적’을 운영하는 김영춘 씨(69)는 “새 학기면 아르바이트생을 7명씩 두고 장사했는데 이제는 옛말”이라고 말했다. 참고서는 안 보고 학원에서 주는 문제지만 푸는 시대가 되면서 ‘신학기 특수’가 사라졌다는 얘기다.

“‘성문종합영어’ ‘맨투맨’은 없어서 못 팔았는데 이젠 안 나간다”고 말하는 김 씨의 옆으로 깨끗한 ‘수학의 정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서점 안에는 한때 집집마다 ‘장식용’으로 뒀던 수십 권짜리 ‘대백과사전’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신 만화잡지 ‘보물섬’ 창간호처럼 소장용 책을 찾는 손님이 늘었다. 관광객도 증가하는 추세다. 안내 지도를 들고 이곳에 온 프랑스인 위그 샤탱 씨(30)는 “프랑스에서 볼 수 없는 흥미로운 공간”이라고 말했다. 다른 지방에서 구경차 놀러오는 사람들이 책을 다량으로 사기도 한다. 책방들은 이런 손님들에겐 택배 서비스를 제공한다.

책방골목의 트렌드가 이처럼 바뀌지만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고 김종훈 회장은 말한다. 그는 “헌책방은 영원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인터넷에서 더 싸게 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거긴 ‘일방향’ 아닙니까. 대형서점도 일방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오는 분들은 ‘소통’을 중시합니다. 여기 책방 사람들은 손님이 찾는 책이 없으면 비슷한 다른 책을 권합니다. 경험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부산=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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