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으로 연 새로움의 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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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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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 교수, 건축이야기 엮은 ‘공간열기’ 펴내

뷰카메라의 주름상자 속처럼 흐름에 따라 벽들이 겹쳐진 서울 서대문구의 김옥길 기념관. 밤에는 공간을 가득 채운 빛이 벽 사이로 새어나와 숲과 거리를 향해 흐르고, 낮에는 반대로 햇빛이 벽 사이로 들어와 공간을 채운다. 공간의 존재가 확인되려면 건축의 물성은 뒤로 숨어야 한다.

경북 안동에 있는 병산서원의 만대루에 오르면 건물과 자연이 중첩될 때 느낄 수 있는 진가를 만끽할 수 있다. 완전히 열린 공간인 만대루는 백사장과 강 건너 병산의 모습을 한껏 받아들이면서 공간의 틀로만 역할을 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벽, 트임, 연속성, 비정형…. 단순히 비워진 상태가 아니라 채워질 것을 준비하는 비움. ‘공간’에 대한 생각은 끊임없이 뻗어나갔고 자신의 건물과 영감을 준 전통건물을 보며 건축에 대한 생각을 다졌다. 김옥길 기념관, 서울 강남구의 어반하이브 등을 건축한 김인철 교수가 자신의 건축 이야기를 담은 책 ‘공간열기(空間列記)’(동녘·사진)를 펴냈다.

책은 건축의 입문부터 개념 배치 형태 형식 용도 기능 공간 영역 장소 설계 졸업까지 12꼭지로 구성했다. 김 교수의 작품 중 한국 전통건축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례 11가지도 소개하며 전통건축을 어떻게 작품에 차용했는지를 들려준다.

“건축은 건축가만의 작업이 아닙니다. 시공사와 집주인,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이 함께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건축 이야기를 쉽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김 교수는 2년여의 시간을 들여 책을 엮은 이유를 그렇게 말했다. 전통건축과 자신의 작품을 병기한 이유에 대해서는 “5000년 동안 갖춰진 건축적 지혜와 그 특성을 소개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59m²(약 18평) 넓이의 좁은 공간이지만 전혀 좁게 느껴지지 않는다. 김옥길 기념관은 벽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통해 공간의 열려 있음, 공간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사진 제공 동녘
59m²(약 18평) 넓이의 좁은 공간이지만 전혀 좁게 느껴지지 않는다. 김옥길 기념관은 벽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통해 공간의 열려 있음, 공간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사진 제공 동녘
강원 춘천 호숫가 집을 설계할 땐 지형에 따라 자연과 동화되도록 지은 창덕궁의 지혜를 빌려 호수의 물안개와 한낮의 청명함을 앉은 자리에서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했다. 다가구 집들이 밀집한 서울 성동구의 행응어린이집은 개방된 누마루와 변용이 자유로우면서 공간감 있는 재사(齋舍)건물의 효율성을 빌려 건물과 건물 사이를 길게 비움으로써 마당을 다용도로 쓸 수 있게 했다.

“전통건축은 작은 건물인데도 답답하지 않죠. 공간을 가두는 게 아니라 열어서 공간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김옥길 기념관은 좁은 공간이지만 내부에선 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김 교수는 책 속 작품 중 전통건축의 묘미를 가장 잘 살린 것으로 김옥길 기념관과 어반하이브를 꼽았다. 겉으로 볼 때 예쁜 모양에 집중한 게 아니라 방 안에서 산과 바위의 조화를 감상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마음가짐처럼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바깥 풍경을 즐길 수 있게 배려했다는 설명이다.

전통건축물에서 많은 지혜를 빌렸지만 책에는 ‘전통건축’이라는 표현 대신 ‘우리건축’이라는 말이 나온다. 정체 대신 발전을 원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책 말미에 ‘전통졸업’이란 소제목을 붙이고 이렇게 썼다. “어반하이브의 설계에 전통적 개념이 동원됐다 하더라도 결과를 그것에 맞추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만 새로움의 발상이 그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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