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집착의 몸놀림… 휴머니즘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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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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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리옹 국립 오페라 발레단, 마츠 에크의 ‘지젤’ 내한 공연
안무 ★★★★☆ 무용수 기량 ★★★★ 무대·의상 ★★★★

지난달 29, 30일 경기 성남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마츠 에크 안무의 ‘지젤’ 2막. 머리에 흰 붕대를 감은 지젤이 정신병원으로 자신을 찾아온 힐라리온을 알아보지 못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서 춤을 춘다. 사진 제공 성남아트센터
지난달 29, 30일 경기 성남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마츠 에크 안무의 ‘지젤’ 2막. 머리에 흰 붕대를 감은 지젤이 정신병원으로 자신을 찾아온 힐라리온을 알아보지 못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서 춤을 춘다. 사진 제공 성남아트센터
이미 몇 차례나 국내에서 장기 공연됐던 매슈 본의 ‘백조의 호수’, 국립 발레단 레퍼토리에도 편입되어 있는 장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 ‘신데렐라’는 원작 발레의 등장인물과 줄거리를 비틀고 완전히 새 안무로 만든 작품들이다. 무용계에서 본이나 마이요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시기적으로도 이들의 원조에 해당하는 이가 스웨덴의 마츠 에크다. 고전을 재창조한 에크의 ‘4대 걸작’ 중에서도 선구적인 작품이 1982년에 초연된 ‘지젤’이다.

원작에서 순진한 시골처녀 지젤은 연인 알브레히트의 정체가 약혼자 있는 귀족이란 걸 알고 그 충격에 실성해 죽는다. 그 2막은 낭만주의적 환상에 어울리는 깊은 숲 속 무덤가에서 벌어지는데, 빌리라는 처녀 귀신들의 일원이 된 지젤이 남자에게 복수하려는 동료들의 뜻과 달리 무덤을 찾아온 알브레히트를 지켜낸다는 내용이다.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때 지젤이 죽음 대신 정신병원에 갔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보다는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수정했는지, 춤이 새로운 상황에 맞고 창조적인지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것이다. 에크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에크의 ‘지젤’은 원래 자신의 어머니가 설립한 쿨베리 발레를 모자(母子)가 함께 이끌던 시기에 만든 것이고, 에크의 아내인 안나 라구나가 첫 지젤을 춤추었다. 이후 에크는 자신의 의지로 쿨베리 발레를 떠나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에 내한한 리옹 국립오페라발레단은 그의 단체가 아니다. 이 무용단은 세상에서 가장 다양한 춤을 소화하는 단체의 하나로서 수많은 현대 안무가의 작품을 섭렵해 왔다. 그런 과정에서 체득한 유연함이 이번 공연에 반영되고 있었다.

필자가 관람한 둘째 날(10월 30일)의 지젤을 춘 케린 나이트는 아담하고 비교적 가녀린 무용수였다. 지젤을 순수한 심성의 백치로 설정한 에크의 의도를 충분히 살리면서도 영상으로 보아왔던 안나 라구나의 억센 남성성과는 구별되는 참신함을 안겨주었다. 캐릭터는 조금 약했지만 춤 자체의 매력은 좋았다는 뜻이다. 1막의 무대 배경을 여인의 푸른 나신으로 묘사한 초현실적인 미술은 지금 보아도 여전히 위트 넘친다. 원작이 그렇듯이 에크의 ‘지젤’도 핵심은 2막이다. 빌리는 정신병 환자들로 대치됐고, 그 우두머리 미르타는 수녀 간호사로 등장한다. 코, 손가락, 가슴 등 인체 조각이 흩어져 그려진 무대는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환자들의 상황을 상징한다. 뇌수술을 받았는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지젤은 과거를 잊었지만 연인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만으로 그를 용서하고 보호한다.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2인무는 낭만 발레의 숭고한 아름다움 대신 현실적인 슬픈 재회를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리옹 발레의 군무진도 1막의 마을 사람들의 거친 춤과 2막의 눈이 풀린 정신병자들의 움직임을 시종 긴장감 있게 추었다.

에크가 위대한 점은 일견 엽기적인 동작들로 한 편의 드라마를 유기적으로 완성하는 능력에도 있지만 차가운 지성이 압도하기 쉬운 오늘날의 공연예술에서 따스한 인간미를 슬그머니 채워 넣는다는 미덕도 놓칠 수 없다. 원작에서 아무런 동정을 받지 못한 채 빌리에게 살해당했던 지젤의 약혼자 힐라리온에게 에크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벌거벗은 채 자연으로 돌아온 알브레히트를 발견한 힐라리온이 원수나 다름없는 그를 공격하려던 마음을 바꾸고 커다란 천을 가져와 알몸의 알브레히트를 덮어주는 것이다. ‘잠자는 미녀’에서도 마약중독자와 유럽 주류사회에서 천대받는 유색인종에 대한 연민을 보여주었던 에크는 무용계의 진정한 휴머니스트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유형종 무용·음악 칼럼니스트 무지크바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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