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연극女왕]10월 서은경… “힘들땐 100년치 달력 보며 마음 다잡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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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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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호흡으로 선배들 가르침 배워 죽을때 좋은 배우로 기억됐으면
방송연예계 온갖 유혹 있었지만 연극무대 설때가 자유롭고 행복”

“클라라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화려하게 빛나고 장차 이름을 떨치게 되리라.”

연극 ‘3cm’에 나오는 대사다. 작곡가 슈만의 부인 클라라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에 나오는 말이다. 라틴어 ‘Clarus’에서 기원한 이 이름은 베토벤의 피아노곡을 소재로 한 연극 ‘33개의 변주곡’에도 등장한다. 변주곡에 얽힌 비밀을 풀어가는 음악학자 캐서린(윤소정)을 돌보는 딸로 출연 중인 서은경 씨(34)의 배역 이름이다.

여배우 서은경은 그 이름과 딱 어울린다. 큰 역을 맡지 않아도 무대 위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2002년 연극 데뷔작 ‘꿈꾸는 식물’로 연출가협회 연기상을 수상한 것도 무대 위에서 그가 발산하는 특별한 존재감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 존재감은 지난해 ‘밤으로의 긴 여로’(연출 임영웅)에서 푼수기 넘치는 하녀 캐슬린 역으로 잠깐 등장할 때조차 빛을 발했다. 이는 언젠가 이름을 크게 떨칠 것이라는 기대로 이어진다. “대한민국 연극 여배우의 계보를 이어갈 만한 기대주”(배우 우상전), “이지적 이미지에도 관객에게 다가설 줄 아는 여배우”(손상원 이다엔터테인먼트 대표)라는 평가가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그는 연극이 많은 시간의 담금질을 필요로 하는 예술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주로 연륜 많은 선배 여배우들의 연기 파트너로 호흡을 맞춰왔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에서 박정자 씨, ‘친정엄마’에서 고두심 씨, ‘강철’ ‘에이미’ ‘33개의 변주곡’에서 윤소정 씨의 딸로 출연해 ‘딸 전문배우’란 말을 들을 정도다.

박정자 고두심 윤소정 씨 등 쟁쟁한 배우들의 딸을 연기하면서 그들의 연기내공을 물려 받아온 서은경 씨가 세상의 모든 딸들을 대신해 ‘10월의 연극여왕’에 뽑혔다. 연극 ‘33개의 변주곡’의 무대에서 만난 그는 “부끄러워서 아직 한 번도 ‘배우 서은경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해본 적이 없다”며 부끄러움과 기쁨을 표현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박정자 고두심 윤소정 씨 등 쟁쟁한 배우들의 딸을 연기하면서 그들의 연기내공을 물려 받아온 서은경 씨가 세상의 모든 딸들을 대신해 ‘10월의 연극여왕’에 뽑혔다. 연극 ‘33개의 변주곡’의 무대에서 만난 그는 “부끄러워서 아직 한 번도 ‘배우 서은경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해본 적이 없다”며 부끄러움과 기쁨을 표현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그런 분들과 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죠. 주변에선 무섭거나 어렵지 않으냐고들 하지만 전 매번 진짜 엄마처럼 편안하게 느껴져 좋아요. 또 배우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박정자 씨에게선 “목숨을 걸고 연기하라”는 엄격함을, 고두심 씨로부터는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혼신의 열정을, 윤소정 씨로부터는 “연기를 즐겨라”라는 여유를 배웠다고 했다. 그는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각 선배를 언급할 때마다 각자의 딸로 돌아가듯 전혀 다른 표정이 배어나왔다. 박 씨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눈이 동그래졌고, 고 씨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가슴에 손을 얹었고, 윤 씨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눈가에 웃음이 번졌다. 박 씨는 그런 그를 두고 “운이 좋은 배우”라고 말했다.

자신에 대해 ‘이지적 이미지’라는 평가에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가 들려준 중고교 시절 서은경은 ‘여자 문재신’(TV드라마 ‘성균관스캔들’의 반항아)이 따로 없었다. 몇 년에 걸쳐 부모의 이혼소송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공부와는 담을 쌓았고 동급생들은 말을 붙이기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여학생이었다고 했다. 남들은 대학에 들어가서나 할 일들을 중학생 때 다 졸업했다는 그는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나 자신”이라고 했다.

“계원예고 1학년 때 연기실습을 배우면서 세상에 대한 원망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맛봤어요. 사는 게 지옥 같던 제게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그러다 고3이 돼서야 대학 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다들 성적이 너무 나빠 안 될 거라고 했죠. 실기시험 때 코트 아래 비키니 수영복을 감춰 입고 가 ‘코러스 라인’의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는데 입학원서를 낸 대학마다 전부 합격해서 학교가 벌컥 뒤집어졌죠.”

그만큼 학창시절부터 미모로 이름을 날린 탓에 방송연예계에서 캐스팅 제의가 물밀 듯 쏟아졌다고 했다. 그런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가난한 연극배우의 길을 택한 이유가 뭘까.

“유명해지거나 돈을 벌려고 배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연기할 때 자유를 느끼고 행복하니까 연기를 하는 거고, 연극무대에 섰을 때가 가장 자유롭게 느껴지기 때문에 연극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33개의 변주곡’의 클라라는 재주는 많지만 “20년 동안 같은 일만 하고 싶진 않다”는 이유로 어느 한 가지에 안주하지 못한다. 실제의 서은경은 반대다. 연극배우의 길이 힘들게 느껴질 때마다 21세기 100년 치 날짜가 적힌 달력을 펼쳐본다는 그는 “죽을 때 ‘좋은 배우’로 기억되는 게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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