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10·26 직후 정치일정 깊숙이 관여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0월 26일 2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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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26 사태 직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는 정국 수습을 위한 정치적 해법과 일정에 대한 자문을 미국에 요청했고, 미국은 정국 혼란을 막기 위해 야당과 군부를 자제시키기 위한 노력에 곧바로 착수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 국장 참석을 위해 방한했던 당시 사이러스 밴스 미 국무장관은 유신헌법 개정을 통한 민간 정부 수립을 희망하면서, 당시 군부 세력이 권력 장악에 나설 뜻이 없다는 그릇된 상황 판단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연합뉴스가 26일 입수한 비밀해제 미 국무부 외교전문에 따르면 1979년 11월3일 당시 박동진 외무장관은 박 전 대통령 국장이 끝난 후 밴스 국무장관과 면담한 자리에서 10·26 이후 정국 안정을 위해 반드시 피해야 할 3대 요소로 △정치적 보복 △군부 권력장악 △유신체제 존속을 꼽으며 이를 위한 미국의 협력과 자문을 요청했다.

박 장관은 특히 최규하 권한대행을 비롯해 과도 정부가 10·26 이후 북한의 유사시 대응, 경제혼란 차단 등을 위한 여러 문제들에 대응하고 있지만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논의를 하지 못한 상태"라며 헌법 개정의 방식과 시기, 대통령 선출방식, 군부와 야당 대응 방안 등 정치적 해법을 밴스 장관과 협의했다.

밴스 장관은 이 자리에서 "미 행정부는 (10·26 이후) 한국에 민간 통제가 지속되고 있는 점을 인상적으로 느끼고 있고, 이 부분은 미국과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며 군부가 권력 장악에 나서는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야당과의 접촉 때에 절제를 당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 배석했고 전날 박 장관과 별도 협의를 가졌던 리처드 홀부르크 당시 국무부 아태차관보는 "존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은 '군부 쪽에서는 권력 장악에 나설 의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해왔다"며 당시 미국의 한국 군부 동향에 대한 평가를 전했다.

그러나 박 장관은 이에 대해 "한국 군부는 매우 크고, 많은 파벌이 있다"며 군부가 권력 장악 의사가 없다는 미국의 판단에 우회적으로 문제를 제기했고, "혼란이 일어나면 군부는 권력 장악에 나설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외교전문에는 기록돼 있다.

박 장관은 이 면담에서 향후 한국 정치체제를 결정할 5대 요인으로 △군부 △야당 등 정치권 △대학생과 지식인 △최규하 권한대행을 비롯한 과도정부 △미국을 꼽으며 "이들 요인들이 종합적으로 한국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한국 국민들은 미국이 현 사태의 전개과정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를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장관은 "국민들은 유신헌법이 잘못된 헌법이라고 여기고 있다"며 개헌 필요성을 제기했고 밴스 장관은 군부와 야당이 '냉각기'를 갖는 동안 절제된 태도를 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최규하 권한대행체제의 정국 안정화 방안과 스케줄을 물어보고, 다음주로 예정된 최 권한대행의 대국민담화 내용에 대해서도 상의했다.

박 장관은 대통령 선출 절차와 과도 대통령의 권한 등을 둘러싼 여러 방안에 대해서도 설명하며 조언을 구했고, 특히 그 다음 주로 예정된 최 권한대행의 대국민담화 초안을 미국 측에 미리 전달할 것이라고 말했고, 밴스 장관도 사전 협의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밴스 장관은 정국 수습을 위한 한미 양국간 긴밀한 협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도 미국의 정국 개입에 대한 반발을 의식, "우리는 여론의 비판에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며 '은밀한 협의(private advice)'를 강조하며 현안에 대해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 및 위컴 사령관과 상의할 것을 당부했다.

밴스 장관은 박 장관과의 면담 후 이날 청와대에서 가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의 면담에서도 "대통령께서 필요하다면 언제든 미국으로부터 조언을 구할 수 있다"며 "결정은 한국정부가 내려야 할 몫이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사령관이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과의 협의 과정에 대해서는 보안을 유지해 여론의 비판에 노출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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