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차 한잔]구한말 ‘심행일기’ 완역 김종학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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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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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강화도조약 체결 느닷없이 요구
조선측 준비 미흡만 비판해선 안돼”

1876년 2월 체결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은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동시에 조선이 전통적 사대교린 질서에서 벗어나 국제법 질서로 이행하기 시작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넓게 본다면 19세기 후반 조선 대외관계사의 향방을 결정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강화도조약의 막전막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 나왔다. 조약 체결 당시 조선의 교섭 대표를 맡았던 판중추부사 위당(威堂) 신헌(申櫶)이 일본 사절단과의 협상 경과 및 조약 체결의 전말을 일기체로 기록한 ‘심행일기(沁行日記)’의 첫 완역본이다. 신헌은 강화도조약 체결(양력 2월 27일)을 전후한 1월 30일부터 3월 1일까지의 과정을 일기로 남겼다. ‘심(沁)’은 강화를 이르던 옛 별칭이므로 ‘심행일기’는 ‘강화 행차의 일기’라는 뜻이다.

번역자는 ‘근대한국외교문서 편찬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김종학 연구원(사진). 김 연구원은 “강화도조약에 관한 기존 연구는 ‘심행일기’를 거의 참조하지 않았고 주로 일본 측 사료를 근거로 했다”면서 “번역하면서 일본 사료를 봤더니 조선의 폐쇄성과 낙후성을 강조하는가 하면 동일한 사건의 서술에서 우리 쪽 시각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일본 측과의 협상 기록, 보고문, 서신, 조약 초안 등 자료를 상세히 수록한 ‘심행일기’는 강화도조약을 이해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일급 사료라고 김 연구원은 강조했다.

‘심행일기’에서 가장 김 연구원의 관심을 끈 대목은 예고 없이 조약 비준이라는 이슈를 꺼내 든 일본의 태도였다. 그는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찾아온 일본 협상단이 이틀째 느닷없이 조약 얘기를 꺼냈다. 철저히 준비해온 일본과 달리 조선은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한 채 협상에 임했다. 그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조약 체결에 있어 조선이 일본에 비해 미흡했다고만 얘기하는 건 곤란하다”고 말했다.

일기에선 조선과 일본의 시대 인식 차이도 드러난다. 김 연구원은 “일본 측은 조약 비준 문서에 고종의 이름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한국 대표단은 그럴 수 없다며 첨예하게 맞섰다”고 설명했다. 이미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일본은 국제적 관례에 따른 문서 작성을 요구했던 것이다.

1876년 2월 20일자 일기에는 이런 대화가 기록돼 있다. “조규책자 마지막 부분의 양식엔 어명(御名)이 있는 어보(御寶)가 없어서는 안 되니, 그렇게 한 후에야 영원불변의 자료로 삼을 수 있다,”(일본) “이 일만큼은 결단코 들어줄 도리가 없다.”(조선) “어명어보가 비록 긴중하다고는 하나 이는 곧 각국에서 통용되는 일인데 귀국에서만 유독 논의를 달리하는 것은 참으로 의아스럽다.”(일본) “천하 각국의 예법이 같지 않으니, 저쪽에서 행해지는 일 가운데서도 이쪽에서는 행할 수 없는 것이 있다.”(조선)

김 연구원은 “조선 대표단은 왕의 이름을 빼기 위해 많은 것을 양보했고, 일본이 그 틈을 타 실리를 듬뿍 챙겼다”고 설명했다. 그는 “강화도조약은 한일강제병합의 시발점으로 볼 수도 있다. 그동안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강화도조약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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