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앙드레김 별세]‘앙드레 김’ 책 쓴 본보 이승재기자… ‘그가 본 그’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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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묘비엔 음~ 유행 연연않고 영원 꿈꿨다고…”

《생전의 앙드레 김은 자서전을 내라는 주위의 권유를 한사코 마다했다. “자서전을 쓰는 순간 프로페셔널로서의 내 삶은 끝난다. 나는 아직 인생을 정리할 때가 아니다”라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후배를 양성하거나 강단에 서지 않은 것도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일선에서 활동하겠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화보집을 제외하면 그가 세상에 남긴 책은 동아일보 이승재 기자와 공동저자로 2002년 발간한 ‘앙드레 김-My Fantasy’가 유일하다. 앙드레 김이 평소 “나의 삶과 철학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다”고 평가해온 이 기자가 앙드레 김과의 오래되고 특별한 인연을 바탕으로 그를 추억한다.》

“너무너무 억울하고 분해요. 저 앙드레 김이 왜 이런 잘못된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제 본명이 김봉남(金鳳男)이라는 게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가요? 부모님이 주신 소중한 이름인데….”

앙드레 김이 격분한 어조로 내게 전화를 걸어온 건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1999년 8월 25일이었다. 하루 전, 그는 정재계의 로비 스캔들이었던 이른바 ‘옷 로비’ 사건을 두고 열린 국회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했다. 청문회장에서 본명을 밝힌 뒤 예기치 않게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자 그는 “사람들이 내 껍데기만 알고 놀림감으로 삼을 뿐 내 진심과 영혼의 세계는 알려고 들지도 않는다”며 울먹였다.

당시 중앙일간지 패션담당기자로는 유일하게 남자였던 나를 앙드레 김은 “내가 한국 최초의 남자디자이너로서 나만의 세계를 일구었듯 이 기자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이룩해 달라”며 각별히 아껴주던 터였다. ‘인간’ 앙드레 김이 궁금했던 나는 그때부터 수시로 그를 만나면서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담겨있는 진정성에 한발 더 다가가려 했다. 그때부터 알게 된 그에 관한 진실들을 모아서 나는 동아일보 주말 섹션 ‘위크엔드’에 ‘앙드레 김-이승재 기자의 테마데이트’란 코너로 연재했고, 이후 각 언론은 이 코너에 담긴 앙드레 김의 진솔한 이야기를 배경지식으로 삼아 그를 잇달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를 존경했고, 그는 나를 믿었다. 2002년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아파트로 나를 초청해 당시 대학생이던 아들 중도 씨와 함께 쓰는 침실을 최초로 보여준 것도 내가 그를 편견 없이 바라보리라는 확신에 따른 것이었다. 하얀 방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하얀 침대. 그는 “잠들기 전 아들은 나에게 친구들 얘기며, 프랑스어 공부 얘기며, 10대들의 유행 얘기를 들려줘요. 그런 아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에요”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12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향년 75세)한 앙드레 김의 아들 중도 씨가 취재진에게 부친의 사망경위와 장례 절차 등을 설명하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12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향년 75세)한 앙드레 김의 아들 중도 씨가 취재진에게 부친의 사망경위와 장례 절차 등을 설명하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그의 숨 막히는 완벽주의는 패션디자이너로서, 그리고 엔터테이너로서 그에게 화려한 입지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흰색 에쿠스 승용차를 함께 타고 가면서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들이 있어서 외롭진 않아요. 하지만 언제나, 고독해요. 전 룸살롱도 노래방도 가본 적이 없어요. 포커나 고스톱도 할 줄 몰라요. 결혼도 하지 못했어요. 한 여인의 남편이 되어 사랑을 나누지도 못했지요. 저에겐 자유롭고 소박한 삶이 없어요. 내가 동네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한 그릇만 먹어도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깃거리가 되니까요. 하지만 저의 독창적인 세계를 지켜가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이겨내야 해요.”

그는 자신의 패션쇼 피날레를 오로지 결혼식 장면으로 장식하는 것도 “내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영원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라고 했다. 그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때론 넋두리 같았고, 때론 시(詩) 같았다. 6·25전쟁 때 피란을 간 부산에서 연상의 여인을 만나 해변에서 플라토닉한 사랑에 빠졌던 그의 첫사랑 이야기에서부터 아들의 눈빛에서 디자인의 영감을 얻는다는 이야기까지….

당시 나는 “선생님은 100세 생신을 맞는 날에도 디자인을 하고 계실 것만 갔다”고 운을 떼면서 “사람들이 선생님을 어떻게 기억해 주길 바라느냐. 혹시 묘비에 새길 내용을 미리 생각해두셨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고, 앙드레 김은 나보다 더 크게 웃다가 이내 진지한 표정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2002년 필자(왼쪽)와 대화하다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만면에 웃음을 띤 앙드레 김. 동아일보 자료 사진
2002년 필자(왼쪽)와 대화하다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만면에 웃음을 띤 앙드레 김.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이건 어떨까요. ‘20세기라는 과거에서 태어나 21세기라는 미래까지 활동한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동양의 에스프리가 담긴 독창적인 세계, 순수한 영원의 세계를 추구했다’고요….”

내게 평생에 남을 따스한 조언을 해준 사람도 앙드레 김이었다. 내가 기자라는 직업을 두고 한때 깊은 회의에 빠졌을 때 “지금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미래의 나도 사랑할 수 없다”는 말로 가슴을 어루만져준 것도 그였다.

앙드레 김. 그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지금쯤 그는 그토록 좋아했던 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의 한 장면을 진정으로 만나고 있을 것만 같다. 아기사슴과 다람쥐가 뛰놀고 하얀 새가 지저귀며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산속을 거니는 미소년이 되어 곧 안개에 싸인 환상적인 성(城)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성 안에서 사뿐히 걸어 나오는 순수한 여인을 발견할 것이다. 안녕히, 앙드레 김.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앙드레김 패션쇼 트레이드마크, 벗어도 계속 나오는 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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