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종교-이념-민족… 책을 불사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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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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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 레베카 크누스 지음·강창래 옮김 / 512쪽·2만6000원·알마

인류역사와 함께한 책의 수난사
“문화 말살해야 점령국 반항 못한다”
나치-세르비아 등 도서관 파괴 만행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벨기에 중부 도시 루뱅의 루뱅 가톨릭대 도서관을 철저히 파괴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이 도서관이 6일 동안 불타면서 희귀한 중세 고서를 비롯한 책 23만 권이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전쟁이 끝난 뒤 패전국 독일의 전쟁 배상금과 국제적 도움으로 도서관은 다시 일어섰지만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의해 또다시 불탔다.

전쟁 중에 군인들은 왜 이처럼 도서관을 철저히 불태우고자 하는 것일까. 미국 하와이대 문헌정보학과 교수인 저자는 “적의 지적·문화적 사회 시설을 상징하는 도서관을 없애는 것은 반항 의지를 꺾고, 경쟁력을 없애고, 상대 국가의 신념과 가치관이 자신들을 향해 취할 위협을 무력화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라는 해답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책의 학살(libricide)’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나오는 ‘libricide’를 저자는 정부가 승인한 책과 도서관 파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면서 긴 인류사에 걸쳐 인종, 문화말살과 함께한 책의 수난사와 그 이유를 설명한다.

○ 문명 보존, 사회 결속 등 핵심 기능

어느 시대에나 도서관은 문명이 사라지지 않게 보존하는 보루였다. 1980년대 미국의 대학생 아론 랜스키는 쓰레기 더미에서 당시 사라져가던 이디시어로 쓰인 책들을 발견했다. 유대인들의 언어였던 이디시어는 독일어에 슬라브어, 히브리어를 섞어 히브리 문자로 쓰는데 두 번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사용자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랜스키는 이디시어 책들을 수집하는 캠페인을 벌여 1990년 100만 권을 소장한 ‘국립 이디시 책 센터’를 열었다. 이 센터는 오늘날 이디시어 텍스트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민족주의적이거나 혁명적인 정권 아래서 도서관은 사회 결속을 지원하고 지배적인 신념과 가치관을 주입시킴으로써 지배 권력을 합법화하는 사회시설이었다. 도서관 역사학자 마이클 해리스는 “도서관이란 지배적인 이념을 만들고 전달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의 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 책을 파괴한 범인들

70만 권의 책을 보유했던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640년 아랍의 정복자들에 의해 파괴됐다. 칼리프 오마르는 “만일 그리스 저작물이 (이슬람의) 신의 책과 일치한다면 쓸모가 없는 것이며, 일치하지 않는다면 간악한 것이니 없애버려야 한다”고 명령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책들은 목욕탕 4000개를 데우는 연료로 사용됐다.

중세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책을 불태웠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 영국에서는 수녀원과 수도원 도서관에 대한 약탈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800여 개의 수도원 도서관에 있던 30만 권 가운데 2% 정도만이 종교개혁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20세기 들어 도서관은 이념의 희생양이 됐다. 1980년대 말 유고연방이 해체된 뒤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걸고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 독립을 선언한 옛 유고연방 국가들과 전쟁을 벌였다. 크로아티아의 도서관, 박물관, 문서보관소 370곳이 파괴됐다.

1989년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범아랍주의를 명분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후세인은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패하고 피해의식에 젖어 있던 아랍사회의 정서를 자극하며 아랍민족주의를 내세웠다. 10만의 이라크 군이 6개월 동안 쿠웨이트를 점령하면서 학교 도서관의 책 43%가 불탔다. 쿠웨이트대의 장서 54만955권도 대부분 유실됐다.

저자는 “세계의 도서관들을 보존하는 것은 인류의 위대함을 증언할 목격자를 보존하는 것이다. 도서관은 인류의 지식 전체를 대변하고, 진보와 인간의 초월 가능성이라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진 유산과 함께하는 것”이라며 인류가 사상과 습관의 차이를 넘어 도서관 보존에 힘을 쏟아야 함을 역설한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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