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왕비가 못된 청… 눈 못뜨고 죽은 심봉사…

  • Array
  • 입력 2009년 11월 5일 03시 00분


코멘트

‘심청전’ 새로 해석한 서울예술단 뮤지컬 ‘청 이야기’

《심청이는 왜 인당수에 몸을 던졌을까. 판소리 ‘심청가’를 필두로 한 이 땅의 예술작품들은 주로 ‘심청의 효심의 발로’로만 이를 풀어 왔다. 하지만 판소리 심청가를 연극화한 국립창극단의 국가브랜드 공연 ‘청’을 보노라면 이에 대한 의문이 생겨난다. ‘청’은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기까지의 1막과 심청이 왕비가 돼 아비 심 봉사와 극적으로 해후하는 2막으로 구성된다. 1막이 사실적이고 비극적이라면 2막은 환상적이고 희극적이다. 판소리 형식에선 불분명했던 이런 간극은 연극적으로 양식화하는 순간 뚜렷한 대비로 다가선다.》환상 결말을 소설적 비극으로 재구성
“41곡중 30곡 고쳐 세계적 고전에 도전”
이 대비가 말해주는 것은 뭘까. 비극적 1막에 끔찍한 진실이 담겼고 희극적 2막은 그 충격을 완화 또는 위로하기 위한 일종의 ‘쇼’라는 폭로가 아닐까. 르네 지라르의 표현을 빌리면 1막은 ‘소설적 진실’이고 2막은 ‘낭만적 거짓’이다.

그러면 소설적 진실은 무엇일까. 약하고 가난한 소녀(어린 양)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집단폭력이다. 거친 바다를 달래기 위한 인신공양이든, 효라는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내면화가 초래한 비극이든 거기엔 사회적 약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에 대한 집단 죄의식이 숨어 있다. 바리공주 설화와 심청전을 연결하는 신화적 구조의 핵심이다.

뮤지컬 ‘청 이야기’에서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청을 살려내 왕궁으로 데려가는 희원 왕자 역의 장현덕(왼쪽)과 청 역의 김혜원. 사진 제공 서울예술단
뮤지컬 ‘청 이야기’에서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청을 살려내 왕궁으로 데려가는 희원 왕자 역의 장현덕(왼쪽)과 청 역의 김혜원. 사진 제공 서울예술단
‘심청전’을 현대적 공연예술로 만들려 한 수많은 시도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데는 ‘낭만적 거짓’에 취해 ‘소설적 진실’을 간과하거나 은폐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14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르는 서울예술단의 뮤지컬 ‘청 이야기’의 새로운 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97년 발표한 창작뮤지컬 ‘심청’(강보람 작, 이종석 연출)을 완전히 고친 작품이다. 심청(김혜원)이 사는 마을엔 귀양 온 왕자 희원(장현덕 임병근)이 있었다. 청에 대한 애틋한 정을 키우던 희원은 임종이 가까운 왕의 부름을 받는다. 가장 빨리 귀경하는 길은 거센 물살이 소용돌이치는 인당수를 건너는 것. 이를 위해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 희원을 보좌하는 권철 대감은 제물로 바칠 처녀를 구하고, 공양미 삼백석이면 심봉사(박석용)가 눈을 뜬다는 거짓 간계에 속은 청이가 희생양이 된다. 인당수를 건너는 배 위에서 처녀제물이 청이임을 알게 된 희원은 함께 바닷물에 몸을 던져 청이를 구한다.

‘청 이야기’는 창극 ‘청’의 1막과 2막 사이 간극에 사실성과 개연성의 다리를 놓는다. 그리고 1막의 소설적 진실에 충실한 비극으로 재탄생한다. 궁궐로 간 심청은 권력투쟁에 희생돼 왕비가 못된 채 귀향하고, 그를 기다리는 것은 딸을 희생시켰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아비의 차디찬 시체다.

1997년 뮤지컬 ‘심청’에서 국악과 양악이 조화를 이룬 음악으로 호평 받은 최귀섭(작곡) 최명섭(작사) 형제는 전체 41곡 중 30여 곡을 새로 썼다. 재창작에 가깝다. 한국뮤지컬의 효시인 ‘살짜기 옵서예’(1966년)의 작곡가 고 최창권 씨의 아들인 형제는 ‘심청전이 세계의 고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 과정을 감수했다고 말했다. ‘쓰릴 미’와 ‘파이브 코스 러브’를 연출한 이종석 연출자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연출하면서 늘 한국적 뮤지컬에 대해 고민해 왔다”며 ‘청 이야기’가 그 답이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청 이야기’가 과연 심청전에 숨겨진 신화적 구조를 잘 살려낼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판도라의 문을 연 첫 작품으로 기록될 수는 있지 않을까. 22일까지 2만∼10만 원. 02-501-7888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