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淸에 으깨진 조선’ 강렬한 무대로 형상화…뮤지컬‘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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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22일 03시 00분


척화-주화파 대립 인물 삶 속에 녹여
예술-흥행성 ‘두 토끼’ 절반의 성공
주제음악 일관성은 다소 부족한 듯

뮤지컬 ‘남한산성’에서 무대 뒤편의 깊은 어둠을 헤치고 태양처럼 등장하는 청 태종 홍타이지(서범석). 그 앞에서 두 손으로 칼을 들고 있는 이가 조선 침략의 선봉장 용골대(함태영)다. 사진 제공 성남아트센터
뮤지컬 ‘남한산성’에서 무대 뒤편의 깊은 어둠을 헤치고 태양처럼 등장하는 청 태종 홍타이지(서범석). 그 앞에서 두 손으로 칼을 들고 있는 이가 조선 침략의 선봉장 용골대(함태영)다. 사진 제공 성남아트센터

무대의 종심(縱深)이 깊게 느껴졌다. 오케스트라 피트 바로 앞에 있던 실물 크기의 꼭두각시가 야수와 같은 청병(淸兵)들에게 무대 뒤로 무자비하게 끌려가는 첫 장면부터 그랬다. 그 꼭두각시가 한없이 먼 길을 한없이 오래 끌려갔을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곧은 대나무 숲을 형상화한 막의 뒤편은 깊고도 무서웠다. 청 태종 홍타이지(서범석)가 올라앉은 대형 옥좌는 겹겹의 인(人)의 장막 뒤편에서 마치 거친 숨을 몰아쉬는 거대 생명체처럼 등장했다. 그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허겁지겁 도망가는 인조(성기윤)의 허름한 가마가 겹겹 성벽 사이 눈발 날리는 어둠 속에서 나타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남한산성의 궁벽함은 현대적 직선과 날카롭게 떨어지는 곡선의 겹겹으로 형상화했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는 동안 한 번에 아홉 차례 머리를 바닥에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장면에선 깊숙한 무대 중간 바닥으로부터 홍타이지를 상징하는 대형 흉상이 태산처럼 솟아올랐다. 첫 장면에서 끌려갔던 꼭두각시는 누더기 베옷을 걸친 채 인조를 대신해 거대 흉상 앞에서 성남아트센터 오페라극장이 쿵쿵 울리도록 머리를 찧었다.

김훈의 베스트셀러 원작을 토대로 한 창작뮤지컬 ‘남한산성’(연출 조광화)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 맞서다 처절하게 으깨지는 한순간을 그렇게 강렬히 형상화했다. 원작 소설은 벌거벗은 폭력 앞에서 창백한 관념의 전쟁을 치르느라 급급했던 조선의 내면 풍경을 담아낸다. 그 원작의 아우라를 살려낸 것은 무대디자인(정승호)의 힘이었다.

그렇게 만든 무대에서 펼쳐진 뮤지컬은 그러나 원작의 관념성을 비켜갔다. 원작에선 척화파 김상헌(손광업)과 주화파 최명길(강신일 오상원)의 양립 구도가 중심축이다. 뮤지컬에서는 훗날 청에 끌려가는 삼학사 중 한 명인 오달제(김수용 이필모)를 끌어낸 뒤 그를 사랑하는 기생 매향(배해선)과 부인 남씨(임강희)의 삼각구도를 중심축으로 설정했다.

향촌 선비 오달제는 청과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의 목을 베러 한양에 올라왔다가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결사항전을 주장한다. 그의 아기를 가진 부인 남씨는 남편을 쫓아 한양으로 왔다가 청군에 납치되고, 매향은 남씨를 구하기 위해 청의 통역관 정명수(이정열 예성)의 노리개를 자청한다. 언뜻 보면 극의 중심축이 매향을 사이에 둔 오달제와 정명수 사이에서 펼쳐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설을 본 관객이라면 오달제가 곧 김상헌이고 매향이 최명길임을 발견할 수 있다. 최명길의 목을 베겠다고 설치는 오달제가 김상헌을 능가하는 척화파의 원형을 보여준다면 남씨를 구하기 위해 웃음과 노래를 파는 매향은 만고의 역적으로 남더라도 종묘사직을 보존하겠다는 최명길의 분신이다. 두 사람은 살아서 죽느냐(최명길), 죽어서 사느냐(김상헌)는 소설의 관념적 대립을 구체적인 삶으로 형상화한다. 매향의 희생으로 능욕을 면하고 최명길에게 구조되는 남씨는 조선의 민중을 상징한다. 정명수는 이런 삼각구도를 가능하게 해주는 촉매다.

결과적으로 이 뮤지컬은 예술성과 대중성이란 두 마리 토끼사냥에 반쯤 성공했다. 문제는 무대디자인과 이야기(고선웅) 음악(김동성 최주영)을 각각 떼어놓고 보면 좋지만 이를 한 줄로 꿰었을 때 균열이 발생한다는 데 있다. 특히 두 명의 작곡가가 참여한 음악에 있어서 김상헌-오달제로 이어지는 주제, 최명길-매향으로 이어지는 주제가 각각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정반합의 완결성을 보여주지 못한 점이 아쉽다. 역사적 배경지식이 없는 관객을 위해 극 초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쫓겨가기까지 긴박한 과정을 대중적 호흡으로 풀어내는 손질도 필요해 보인다. 11월 4일까지. 031-783-8000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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