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동아미술제 전시기획 당선작 전시회 일민미술관서

  • 입력 2009년 9월 15일 02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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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팍한 세상, 상상력은 윤활유

유리 진열장에 소중하게 보관된 40권의 책. 백과사전처럼 보이는 이 책들은 사실 인터넷 검색창에 40개 단어(Ugly, Money 등)를 입력한 뒤 쏟아진 자료를 검증 없이 수록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에밀리오 차벨라 페레스 씨의 ‘구글에 따르면’)

벽면에는 불특정 다수의 적과 싸우는 투명 몬스터가 그려져 있다. 상대를 알 수 없기에 더욱 힘겨운 싸움을 앞둔 검정 가면의 몬스터. 낯선 몬스터는 우리를 기이한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이승애 씨의 ‘검은 영웅’)

10월 11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2009 동아미술제 전시기획공모 당선작 전시회’는 우리가 몸담은 현대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짚어낸 두 기획자의 전시를 선보인다. 영국에서 활동 중인 신진 큐레이터 황규진 씨(25)가 기획한 ‘보이는 손’의 경우 멕시코 작가 페레스 씨를 비롯해 각기 다른 사회 문화적 배경을 가진 국내외 작가 7명이 세계화와 시장경제를 해석한 작품을 보여준다. 3층에 올라가면 고원석 씨(36·공간화랑 큐레이터)가 이승애 씨처럼 나름의 생태계를 만들어낸 6명의 작업을 바탕으로 ‘플래닛 A: 종의 출현’전을 구성했다.

‘보이는 손’은 자본주의와 미디어가 통제하는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페레스 씨의 작품은 검색 포털사이트의 숱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을 풍자한다. 또 오사마 빈라덴과 맥도널드 캐릭터를 합친 이미지를 내놓은 조너선 반브룩 씨, 닭을 갈아 이를 야구공으로 만든 이완 씨, 미디어의 일방적 소통과 조작을 통해 현실과 가상의 문제를 제기한 진기종 씨 등은 현대 시장경제의 횡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다.

새로운 종의 출현에 대한 인식을 담은 ‘플래닛 A’전은 평면과 사운드아트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경계 없는 무한한 예술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이승애, 이해민선 씨는 고유한 구조와 형식을 갖춘 변이 생물체를 만들어냈다. 스스로 생성하고 소멸하는 사운드로 이뤄진 김병호 씨의 작품이나 소리에 방향성을 부여한 김기철 씨의 설치작업은 청각과 상상력의 결합을 제시한다.

두 전시는 탄탄한 역량을 지닌 기획자들의 뚜렷한 주제의식이 독창적 작품들과 조화를 이룬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경영학과 예술경영을 전공한 뒤 대안공간과 갤러리에서 경험을 쌓은 고 씨는 “큐레이터는 여러 작품을 모아 소통의 형태로 전시를 보여주는 사람”이라며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자체가 너무 건조하다는 아쉬움에서 새 세계를 보여준 작업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들의 자유롭고 제한 없는 상상력을 응용할 수 있다면 생활이 더 즐거울 것이란 게 그의 믿음이다.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뒤 영국 유학을 떠나 현재 주영 한국문화원 코디네이터로 일하는 황 씨는 “수상 소식을 듣고 부모님이 저보다 더 기뻐하셨다”며 “처음으로 단독 기획한 전시를 일민미술관처럼 좋은 공간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이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과 목소리를 담아내는 전시가 그의 꿈이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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