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욕망의 수돗가에 모인 인간군상 들여다보기

  • 입력 2009년 9월 1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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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자여 내게 오라”며 손짓하는 듯한 고장 난 수도꼭지 앞에서 다양한 인간군상의 이미지를 침묵 속에 극화한 ‘물의 정거장’. 사진 제공 임종진 씨
“목마른 자여 내게 오라”며 손짓하는 듯한 고장 난 수도꼭지 앞에서 다양한 인간군상의 이미지를 침묵 속에 극화한 ‘물의 정거장’. 사진 제공 임종진 씨
극단 무천 ‘물의 정거장’ 내달 4일까지

최대 50명까지 관객을 수용한다지만 지하 1층의 공연장엔 객석이 없다. 무대도 따로 없다. 지하주차장을 개조한 듯한 바닥에는 노란색 중앙선과 흰색 차로가 지나가고, 중앙엔 수돗물이 졸졸 흘러나오는 수돗가가 환한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다. 그 어두컴컴한 주변에 배우 11명이 관객과 뒤섞인 채 미동도 없이 서있거나 앉아있다.

이윽고 에리크 사티의 피아노곡 ‘3개의 짐노페디’가 흘러나오면 그 느린 피아노 연주에 맞춰 공연장 곳곳에 숨어있던 배우들이 마치 영원의 저주를 받고 바윗돌을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천천히 움직인다. 그리고 번갈아 수돗가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가출한 듯 보이는 소녀는 손에 든 빨간 컵으로 수돗물을 받아 마신다. 등짐을 진 사내와 여행 가방을 든 사내는 서로 먼저 수도꼭지에 입을 대려다 입을 맞춘다. 후줄근한 양복쟁이 사내와 긴 밧줄로 연결된 빈 유모차를 끌고 그의 뒤를 따르던 아내는 수돗가 앞에서 권태롭게 몸을 섞는다. 맨발에 양산을 쓴 여인은 수돗가에 온몸을 던지고, 빨간색 하이힐 한 짝을 든 노파는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다.

대사는 한 줄도 없다. 졸졸 새나오는 수돗물 소리와 피아노 선율만이 어두운 공간을 흘러 다닌다. 피아노곡이 미국의 영화음악가 필립 글라스의 ‘오프닝’으로 바뀌고 배우들이 1에서 23까지 수를 세긴 해도 분위기 전환 정도에 머물 뿐이다.

1996년 서울생활을 접고 경기 안성시 죽산으로 내려갔던 극단 무천의 김아라 대표가 서울 대학로에 둥지를 마련한 창작팩토리 스튜디오 09에서 공연하는 ‘물의 정거장’이다. 몸짓만으로 이미지를 창출하는 ‘침묵극’ 장르를 개척한 일본의 연극인 오타 쇼고의 대표작이다.

관객은 생명의 근원인 물을 중심으로 60분 동안 펼쳐지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몸짓을 관찰하면서 명상에 빠지게 된다. 처음엔 물의 정거장이 수돗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곧 인간이야말로 물이 머물렀다가 흘러가는 정거장이 아닐까 하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 김 대표는 12월엔 아르코예술극장에서 ‘모래의 정거장’, 내년 8월엔 제주의 한 동굴에서 ‘바람의 정거장’을 공연해 오타 쇼고의 침묵극 3부작 완결에 도전한다. 10월 4일까지. 070-7501-0001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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