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가 만난 사람] 새벽을 청소하는 전 동양챔피언 최재원

  • 입력 2009년 7월 2일 20시 29분


19전 18승 그 주먹으로 새벽을 엽니다

“매일 같죠. 아침 4시반에 기상하면 잠을 깨기 위해 커피를 한 잔 마십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회현동 현장으로 나가서 2시간 정도 아침작업을 하지요. 한꺼번에 인도와 차도를 다 쓸어버립니다. 내가 청소한 길 위로 시민들이 출퇴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아침일이 끝나면 오토바이를 타고 다시 신당동 집으로 가서 설거지, 빨래하고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와서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2차작업을 하고요. 또 집에 가서 밥 먹고 다시 나와서 3차작업을 합니다. 대략 3시 정도에 퇴근을 하지요.”

‘요즘 어찌 지내시냐’라는 ‘말문 트기용 질문’에 최재원(42)씨는 숨도 안 쉬고 자신의 하루를 쏟아냈다.

현재 직업은 서울 중구청 소속의 환경미화원. 그러나 그는 전직 복서다. 그것도 그냥 복서가 아닌, 동양챔피언 출신이다. 세계타이틀전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치렀지만 푸에르토리코 선수에게 졌다. 유일한 패배였다.

19전 18승 1패(10KO)로 은퇴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재기의 꿈을 키웠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4전을 추가한 뒤 글러브를 벗게 된다.

최씨는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코미디언이 꿈이던 최씨가 살던 동네는 시골이라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TV를 보기 위해선 10리나 떨어진 이장집으로 가야 했다. 이장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전기요금으로 10원씩을 받았다.

타잔을 보기 위해 10원을 들고 달려가 보니 사람들이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웃통을 벗고 나와 주먹으로 치고받는데 그게 그렇게 신기해 보일 수가 없었다.

초등학생 최재원은 당장 쌀 두 말을 팔아서 권투 글러브를 샀다. 등교하는 아이의 가방 속에는 책은 없고 글러브 한 짝만 덜렁 들어 있었다. 눈에 보이는 친구들은 무조건 그의 스파링 상대가 되어야 했다. 나중에는 선생님하고도 스파링을 했다.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끝이다.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3개월 만에 돼지 저금통을 깬 670원, 권투 글러브만 들고 서울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중국집뿐이죠. 중국집서 배달을 하면서 택시기사였던 외삼촌 집에 얹혀살았는데, 권투를 하고 싶다고 하니 수소문 끝에 동아체육관에 입관시켜주시더라고요.”

동아체육관 앞 중국집에 취업했다. 중국음식점이 좋은 점은 배달이 없는 한가한 시간에 체육관을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더 좋은 점도 있었다. 최씨가 일하던 중국집은 김득구, 김환진, 황준석, 박종팔같은 하늘같은 선배들이 운동을 마치고 들르던 장소였다. 선배들이 탕수육, 잡탕에 소주 한 잔 마시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자면 어린 최재원의 주먹에도 힘이 불끈 들어갔다.

“세계챔피언이 되고 싶었던 거죠. 아마 그때 직업이 서른 몇 개인가 되었을 거예요. 슈퍼마켓, 찻집, 웨이터보조, 주유소, 사진관, 분식점 … 다 기억도 안 납니다. 권투를 하기 위해 한 일들이라 하면서도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프로데뷔 이전 아마추어 선수생활을 하며 50여 전의 경기를 했다. 대회 성적은 좋지 않았다. 아마추어 세계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은 일반인 출신 선수는 아무래도 찬밥이기 쉬웠다.

오기가 생겼다. 85년 전국체전을 앞두고 독하게 몸을 만들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다가 짬이 나면 뒷골목으로 가 팔굽혀펴기를 50회씩 했다. 새벽이면 녹번동에서 북한산까지 로드워크를 했다. 결과는 서울시 예선에서 강자들을 모조리 꺾고 우승. 서울대표가 되어 보무도 당당히 강원도 원주에서 열린 전국체전에 나갔다.

“김성길이란 상대를 만났는데, 국가대표였어요. 딱 얻어맞고 RSC(프로권투의 KO에 해당)로 졌죠. 서울시에서 하루 3만원씩 주던 걸 딱 중단하고는 ‘너, 내려가’하더군요. 청량리역에 내렸는데 누구 하나 반겨주는 사람이 있나. 비는 억수로 오지 ….”

체육관에 가서 짐을 내려놓고는 막연히 서울역으로 갔다. 그리고 달렸다.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경찰에게 걸렸다. 국도를 달렸다. 온 종일 비가 내렸다. 영화 속 포레스트 검프처럼 달리고 달리다 보니 천안이 나왔다. 그제야 시계를 봤다. 낮12시에 출발했는데 시계는 6시 2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슴 한 구석의 응어리가 조금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최씨는 비를 좋아하게 됐다.

1987년 최재원은 MBC신인왕전 주니어페더급에서 우승했다. 3연속 KO로 이기며 4전 전승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상대는 김봉철이었다.

“너무 멋있게 하려고 하다가 복병을 만난 거죠. 1라운드에 다운을 당해버렸어요. 판정으로 이기긴 했지만 최우수상은 못 받았습니다. 오히려 약이 됐죠. 그거 받았으면 더 교만해졌을 거예요.”

1989년 그는 동양챔피언에 올랐다. 당시 아내의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다. 신인왕전이 끝나고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던 시절, 기도원에서 만난 아내였다. 세계챔피언이 된 후 화려하게 해주겠다며 결혼식도 미뤄왔던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계챔피언이 될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당시 동아체육관은 초대형 스타 유명우를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른 소속 선수들은 경기가 없어 애꿎은 주먹만 울리던 시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인도네시아에서 동양챔피언 2차 방어전을 치렀다. 첫 해외원정경기였다.

“원사이드하게 7회 KO로 이겼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신문을 보는데 허준이 사라고사에게 도전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죠. 제가 해야 할 시합이라고 느꼈어요.”

일본 오사카에서 신인왕 출신을 2라운드 KO로 눕힌 얼마 뒤 최재원은 만취한 상태에서 김현치 사장집을 찾아갔다. 유명우가 타이틀을 빼앗기자 권투에 대한 흥미를 잃었는지 김현치씨는 동아체육관을 박종팔에게 넘긴 뒤였다.

최씨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엉엉 울었다.

“사장님 하나 믿고 14살 때부터 여기까지 왔는데,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했죠. 세계챔피언 한 번 하고 싶다고. 한 달 뒤 김현치 사장님이 다시 체육관을 인수했어요. 그리고 정말 기회를 줬지요.”

1993년 12월, 베네수엘라의 안토니오 세르메뇨를 꺾고 그토록 원하던 세계챔피언 도전자가 됐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7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윌프레도 바스케스에게 패하고 말았다.

한 번의 패배. 그러나 그의 권투인생은 이날 이후 가파른 몰락의 길을 걸었다. 아니 삶 자체가 무너져 내렸다.

하는 일마다 끝이 안 좋았다. 나이트클럽 웨이터 보조일은 수입이 좋았다. 하지만 시비 끝에 벌어진 싸움에서 상대의 배를 친 것이 장이 파열되는 바람에 고액의 병원비를 물어주어야 했다.

방송국 단역배우도 했다. ‘이야기 속으로’, ‘경찰청 사람들’ 등 30여 편에 출연했지만 고정수입이 안 돼 포기했다. 카센터 모퉁이에 일수를 얻어서 자동차 선팅가게를 냈지만 빚만 1000만원가량 지고 접어야 했다.

길거리에서 군고구마와 군밤을 팔았다. 하루 15만원씩 팔았지만 그것도 겨울이 지나자 그만이었다. 생활고에 빚이 쌓이고, 직장 문제로 갈등을 빚던 아내가 집을 나간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야구를 하고 싶어 하는 아들 용환을 위해 최씨는 2003년 환경미화원 공채시험을 봤다. 야구는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다. 최씨의 월급만으로는 아들을 밀어줄 수 없었다. 아들은 사회인 야구를 통해 야구에 대한 갈증을 풀면서, 아버지를 따라 권투 글러브를 꼈다.

피는 속일 수 없는 법. 아들 용환은 타고난 운동감각과 아버지의 지도로 7개월 만에 전국대회에서 입상해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최씨에게는 목표가 있다. 지난 6월 8일 해병대에 입대한 아들이 제대하면 함께 체육관을 운영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최씨는 악착같이 저축을 하고 있다. 작년부터는 한 달에 200만원이 넘게 통장에 넣는다. 그의 한 달 용돈은 10만원. 쌀은 복지카드로 싸게 사서 두 달을 먹고, 수산시장에 가서 조기, 고등어를 떨이로 사다 역시 두 달을 먹는다.

이렇게 ‘왕소금’ 생활을 한 끝에 1년 동안 3000만원을 모았다며 최씨가 웃었다.

“힘들고 어려우신가요? 링 위에서 내가 지쳐있으면, 상대선수도 틀림없이 지쳐있을 겁니다. 그 고비를 넘겨야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되지요. 저는 현역시절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너무 큰 것만 바라보면 지치고 맙니다. 생각은 때론 단순한 게 좋을 때가 있지요. 생각은 짧게, 시작은 화끈하게. 아직 마지막 공이 울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링을 박차고 일어나세요. 좋은 앞날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사진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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