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는 소재일뿐… 주제는 사회 현실”

  • 입력 2009년 6월 9일 02시 54분


2400m가 넘는 초고층 건물 ‘빈스토크’를 배경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우회적으로 그려낸 배명훈 작가. 그는 “문명비판을 문제의식으로 던졌지만 그 대안은 특정 이념이 아니라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 그 자체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2400m가 넘는 초고층 건물 ‘빈스토크’를 배경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우회적으로 그려낸 배명훈 작가. 그는 “문명비판을 문제의식으로 던졌지만 그 대안은 특정 이념이 아니라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 그 자체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첫 연작소설집 ‘타워’ 펴낸 배명훈 씨

두바이 초고층서 착안했지만 그 안에 사는 인간에 더 관심

순수-장르문학 구분은 무의미

‘빈스토크’(beanstalk·‘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하늘까지 솟은 콩줄기)는 총 674층에 50만 명이 사는 지상 최대의 건축물이다. 주권을 인정받은 도시국가로, 어느 교통체계보다 치밀한 유료 엘리베이터 노선과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곳. 여기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여 살며 시시각각 사건을 일으킨다. 좌우 대립을 연상시키는 수평주의자와 수직주의자의 갈등, 보신(保身)을 위해 현실참여에서 자연주의로 선회한 작가, 인기 영화배우로 활동하며 권력의 정점에 선 개….

이 낯선 작가의 상상력은 폭발적이다. 탄탄하게 얽힌 설정과 생동감 넘치는 등장인물들은 한국사회에 대한 신랄하고 유쾌한 알레고리로 읽히며, 능청맞은 유머는 읽는 재미를 더한다. 첫 연작소설집 ‘타워’(오멜라스)를 펴낸 소설가 배명훈 씨(31)는 이른바 ‘문단의 바깥’에서 탄생한 작가다. 2005년 ‘과학기술창작문예’로 등단한 뒤 장르 문학 전문 잡지, 웹진을 중심으로 활동해왔기 때문이다.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이마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최첨단 자본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빈스토크’란 건물을 배경으로 현실세계의 모순을 우회적으로 풀어낸 독특한 작품이다. 착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TV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두바이 초고층건물 엘리베이터 공사 장면을 보다가 떠올리게 됐다. 일단 ‘초고층 건물과 엘리베이터’란 뼈대가 정해지고 나자 나머지는 줄줄이 딸려 나왔다. ‘오, 적어도 30년은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하고 생각했다.(웃음) 사람과 관련한 모든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무궁무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쓸 작품에도 빈스토크는 계속 등장할 것이다.”

―과학소설(SF) 작가가 썼다곤 하지만 아무리 봐도 SF 같진 않다. 과학적 설정이나 미래 환경에 대한 묘사보다는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책 어디에도 이 소설이 SF라는 말은 없다. SF 작품이라면 이런 건물이 어떻게 세워질 수 있는지에 더 공학적으로 접근했겠지만 나는 사회과학적 상상력에 더 관심을 뒀다. 이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빽빽하게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장르문학 작가’ ‘SF 작가’로 분류된다. 이런 꼬리표는 작가로서 이득인가, 제약인가.

“좋게 보면 ‘SF 작가’란 것은 상상력의 제한을 풀어도 되는 일종의 면허 같은 것이다. 하지만 한번 붙으면 결코 떨어지지 않는 것이 이런 꼬리표기도 하다. 쓰는 입장에선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딱히 어느 영역에 속하기 힘든 ‘애매한 글쓰기’가 이미 한국문학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문단 작가든, 장르문학 작가든 길게 보면 그런 구분은 무의미한 것 같다.”

―서울대에서 외교학 석사 학위를 받고 SF 작품을 쓰는 이력이 독특하다. 권력문제, 이념대립, 부동산 투기, 표현의 자유 등 현실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작품 경향에 영향을 미친 것도 같은데….

“순수문학은 인문학에 편중돼 있고 SF는 공학으로 치우친 면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 작품 속에 사회과학적 시선을 녹여낼 수 있는 과정이 즐겁다. 한동안은 사회문제에 계속 관심을 가질 것 같다.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너무 재밌어서 쓸 게 많다. 현실참여에 대한 강박이나 부담감 때문에 제약을 느꼈던 윗세대 작가들과 달리, 나는 사회 현상과 객관적 거리감을 유지하며 목소리를 내는 데 자유롭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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