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 영문학자 장영희 서강대 교수 별세

  • 입력 2009년 5월 11일 02시 58분


“하늘에서도 희망 이야기 들려주세요”
소아마비-세차례 암선고 딛고 주옥같은 글-강의로 ‘희망’ 전파
“더욱 아름다운 기적 만들것”…운명 하루전 마지막 수필집 완성

“맞다.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갈 것이다.”(책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

어려운 이웃과 장애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담은 수필로 우리의 각박한 영혼을 일깨워 온 장영희 서강대 영어어문·영어문화학부 교수가 9일 유방암 척추암에 이어 세 번째 쳐들어온 간암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별세했다. 향년 57세.

오빠 장병우 전 LG오티스 대표는 “동생은 일주일 전 퇴원해 평소 사랑했던 조카들과 함께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었다. 숨지기 이틀 전 다시 입원했으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엄마…’였다”며 “동생이 평소 아버지의 호(우보·又步)를 딴 장학금을 만들어 제자들을 돕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해 가족들이 추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평소 장 교수는 “신은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넘어뜨린다”며 “나 역시 넘어질 때마다 어떻게 다시 일어서야 할지를 생각한다”고 말하곤 했다.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완성돼 유작이 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에서 그가 마지막까지 남기려 했던 말도 삶에 대한 희망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적의 힘이었다.

그는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 1급 장애인이 됐으나 삶의 희망과 의지를 잃지 않고 역경을 넘어선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였다. 그는 서강대 영문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아버지이자 국내 번역문학계의 태두인 영문학자 고 장왕록 전 서울대 명예교수와 ‘펄벅의 살아있는 갈대’를 번역해 소개했다. 수필집 ‘문학의 숲을 거닐다’ ‘내 생애 단 한번’ 등을 냈다.

장 교수는 수필이나 동아일보의 ‘동아광장’ 등 칼럼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한편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매몰차게 대하는 세태를 꼬집었다. 2006년 7월부터 2008년 6월까지 쓴 동아광장 칼럼 중 ‘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보라’에서 그는 “장애 판정을 받고 암투병 생활을 하지만 천형(天刑)이 아닌 천혜(天惠)의 삶이었다”며 자신을 ‘천형 같은 삶을 극복하고 일어선 희망의 상징 장영희’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불쾌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이 멋진 세상을 사는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갈 뿐”이라고 말했다.

장 교수는 칼럼에서 초등학생인 조카 민수가 예쁜 마음과 배려하는 마음을 배우는 데서 본 희망, 중증장애인으로 석사학위를 받아 국내 기업에 취직한 진석이의 험난한 출근길, 마포구 연남동에서 등록금을 벌기 위해 붕어빵을 파는 대학생 민기 등의 이야기를 담백한 울림으로 전했다.

장 교수는 병상에서 써 책에 실은 마지막 에세이 ‘희망을 너무 크게 말했나’에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내던지지 않았다. “지저분한 얼룩마저도 정답고 아름다운 이 세상, 사랑하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세상을 결국 이렇게 떠나야 하는구나. 순간 나는 침대가 흔들린다고 느꼈다. 악착같이 침대 난간을 꼭 붙잡았다. 마치 누군가가 이 지구에서 나를 밀어내듯. 어디 흔들어 보라지, 내가 떨어지나, 난 완강하게 버텼다.”

유족으로는 어머니 이길자 씨, 오빠 장 씨 외에 언니 영자 씨, 동생 영주 영림 순복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은 13일 오전 9시. 02-2227-7550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