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T혁명 문화 판도를 바꾼다]<2>또 하나의 삶, 가상현실

  • 입력 2009년 4월 21일 02시 45분


디지로그북 펼치자 코끼리가 살아 움직인다

《13일 광주 북구 광주과학기술원(GIST) 문화콘텐츠기술연구소.

책상 위에 펼쳐진 동물 그림책에 동물은 없고 숲과 들판만 있다.

미리 마련된 카메라가 그림책을 비췄다.

그림책 뒤 컴퓨터 화면에 실제 그림책뿐 아니라 그림책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코끼리, 사자 등 가상의 3차원(3D) 디지털 이미지가 함께 나타났다.

기자가 화면을 보며 손에 쥔 햅틱(촉각) 장치를 코끼리(실제로는 허공)에 대자 진동이 느껴졌고 코끼리를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림책 위 공간에 아무것도 없지만 마치 화면 속 코끼리에 해당하는 빈 공간에 코끼리가 있는 듯 느껴졌다.

코끼리를 그림책 속 이곳저곳에 마음대로 옮겨놓고 코끼리 몸체를 돌리며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팝업북의 ‘3D 디지털 버전’이라 할 만한 이 기술은 광주과기원이 개발한 디지로그(Digilog·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북이다.》

실재-가상 접목 ‘증강현실’

카메라로 촬영 더 생동감

데스크톱으로 구현 가능

교육-골프등 폭넓게 활용

○ 실제 그림책 위에 노니는 가상의 동물들

디지로그북에 사용된 기술은 실재에 가상이 접목된 증강현실(AR·Augmented Reality) 기술. 콘텐츠와 배경을 모두 디지털화하는 기존 가상현실(VR·Virtual Reality) 기술과 달리 가상 3D 콘텐츠의 활동 무대가 카메라로 촬영한 실제 현실(Reality)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슈퍼컴퓨터가 필요한 고비용 기술인 가상현실과 달리 증강현실은 데스크톱과 노트북으로도 구현이 가능해 최근 출판과 교육, 스포츠, 모델하우스 등 일상과 접목된 증강현실 기술 개발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광주과기원은 2010년 3월 허균의 홍길동전을 디지로그북으로 선보일 예정이며 증강현실 관련 기술 30여 건의 특허를 출원했다. 또 5월에는 벤처기업인 G-ART를 설립할 계획이다. 우운택 문화콘텐츠기술연구소장은 “종이 질감이 사라지는 전자책의 거부감을 줄이고 콘텐츠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어 내용을 바꿀 수 없는 종이책의 한계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광주과기원은 2차원의 책이 아닌 3차원의 미니어처에 디지털 콘텐츠를 접목한 기술도 개발했다. 미니어처에 가상의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가상의 눈과 비가 내리게 할 수 있다. 이런 기술은 모델하우스의 가구 배치, 대형 빌딩 안내, 전시관과 박물관에 재현된 모형 설명에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 전구, 건전지 없이 완성한 전기회로도

증강현실 기술은 공교육에도 활용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경기 화성시 장안초교 5학년 학생들은 전기회로 꾸미기 수업을 받았지만 아무도 실제 건전지와 전구, 전선을 준비해 오지 않았다.

증강현실 기술을 이용한 과학 수업이었던 것. 학생들은 가상의 3D 디지털 전기회로도 상에서 가상 전구와 전선, 건전지, 스위치를 실제처럼 옮겨 전류의 흐름을 공부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개발한 이 기술은 지난해 전국 9개 초등학교 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시범 서비스됐다. 과학 수업의 콘텐츠는 동아사이언스가 개발했다. 전기회로도 이외에 무인도에 갇힌 소년을 탈출시키는 게임 형식으로 배우는 해륙풍의 원리, 동화 신데렐라의 주인공이 돼 영어 배우기 등의 콘텐츠가 나왔다.

ETRI는 원격 가상현실 기술을 통한 영어 체험학습 시스템도 개발해 대전 배울초등학교에서 시범 서비스 중이다. 교실 한쪽 벽에 설치한 대형 스크린에 가상의 미국 지하철역이 나타나고 원어민 교사와 학생을 실시간으로 찍은 영상이 스크린에 나타나 역할 놀이를 하며 영어를 배울 수 있다.

○ 국산 가상 골프 기술 1000억 원 벌어

증강현실 기술은 해외에서 신발, 선글라스 등 상품을 구입하기 전 가상의 모델과 사이즈를 테스트하는 데 사용되고 있으나 국내에서는 아직 시장을 형성하지 못했다.

증강현실 기술을 이용해 국내에서 가장 성공한 것은 스크린골프다. 국내 스크린골프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는 기업 ‘골프존’은 순수 국산 기술로 성공적인 가상 스포츠를 만들어 냈다. 골프존의 기술은 이용자가 실제 골프채로 실제 공을 친다는 점에서 증강현실이다. 이용자가 친 공이 대형 스크린에 부딪치는 순간 170여 개의 센서가 공의 높이와 방향을 분석해 공의 잠재적 거리와 속도를 산출하면 가상의 골프공이 3D 디지털 필드를 날아간다. 2002년 처음 선보였을 때 10억 원이던 매출액은 6년 만인 지난해 1009억 원으로 100배 늘었다.

한국 기술의 해외 수출도 가시화되고 있다. 골프존의 기술은 지난해 중국 일본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20여 개국에 수출됐다. 광주과기원의 증강현실 기술은 사우디아라비아에 해부 실습 콘텐츠로 수출될 것으로 전망된다. 광주과기원 과학기술응용연구소 김원 부장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자 의대생은 실제 시신으로 해부 실습을 하지 못하고 남자 의대생들의 실습을 관찰하는 것으로 대신했다”며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해부 실습에 3D 가상 시신을 적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고 말했다.

광주=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증강현실(AR)은 실재에 가상의 디지털 콘텐츠를 접목했다는 점에서 가상현실(VR) 기술의 하나다. 그러나 전통적 의미의 가상현실이 컴퓨터가 만든 가상공간에 가상의 콘텐츠를 구현한 반면 증강현실은 현실 세계에 디지털 콘텐츠를 ‘덧입혔다’는 점이 다르다. 배경을 디지털로 작업하는 바람에 사실감이 떨어지는 전통적 가상현실보다 증강현실은 실사를 디지털화해서 생동감 있는 ‘가상현실’을 구현할 수 있다. 비용도 적게 들어 놀이 교육 쇼핑 등 일상에 적용하는 기술의 개발이 활발해지고 있다.

▼車운전도 직업훈련도

가상 시뮬레이터면 OK▼

16일 경기 고양시 한국건설기술연구원. 기자가 도로 시설의 효과와 도로의 안전성을 평가할 수 있는 가상현실 도로 운전 시뮬레이터(실제와 같은 상황을 재현하는 장치)가 설치된 자동차에 탔다. 앞의 대형 스크린에는 화창한 날씨의 도로가 펼쳐졌다.

시동과 주행, 제동, 방향 전환까지 실제 운전과 똑같았다. 밤 상황에서 전조등을 켜자 스크린에 실제 전조등이 켜진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났다. 주행 중 도로면에 사선 모양의 가지가 연속해서 뻗은 별도의 차선 표시가 보여 속도를 줄였다. 차량 바퀴가 실제로 굴렀다고 생각했지만 한국건설기술연구원 김종민 연구원은 바퀴는 구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날 체험한 도로 표시는 올해 도로에 실제로 적용할 계획인 감속 유도 차선.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은 3월 개발한 이 시뮬레이터(K-ROADS)를 활용해 20∼70대의 실제 남녀 운전자 40명을 대상으로 감속 유도 차선의 유용성을 평가했다. 차량 내부에 장착된 안구 측정용 카메라 및 브레이크와 연결된 반응 감지 장치가 도로 시설에 대한 운전자의 반응과 속도를 측정한다. 이 시뮬레이터는 도로에 설치될 표지의 효과와 도로의 위험 요인을 가상 도로 주행으로 미리 알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안개 낀 날 앞차가 지나갈 때마다 빨간불이 켜지는 차간거리 안내 시스템, 곡선도로에서 차량이 과속할 경우 빨간불이 켜지는 커브 표시 안내판 등 도로에 실제로 설치될 시스템들이 운전자들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가상현실 시뮬레이터는 직업 훈련에도 활용된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40억 원의 예산을 들여 2006년 개발해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이 도입한 가상 선박 도장 시뮬레이터가 대표적이다. 도장은 선박 제작 과정 중 2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지만 분사총을 사용해 선박 표면에 페인트를 고르게 칠할 수 있을 때까지 훈련시키기가 쉽지 않다. 선박 도장 시뮬레이터는 스크린에 빈 분사총을 뿌리면 실제 페인트가 뿌려지는 상황을 똑같이 재현했다. ETRI 손욱호 박사는 “삼성중공업의 경우 10주간의 실습 과정이 별도로 편성돼 있고 대우조선은 실습 과정 없이 실제 작업에 투입돼 6개월을 훈련받아야 분사총을 잡을 수 있다”며 “시뮬레이터로 훈련하면 2주 만에 도장이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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