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링크]신라 첨해왕 친형, 왜군 찾아가 왜 화형 자청했나

  • 입력 2009년 3월 14일 02시 58분


◇ 신라인 이야기/서영교 지음/311쪽·1만2000원·살림

신라 조분왕(230∼247)의 사촌동생 우로(于老)는 말 한마디 때문에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244년 신라의 최고 관등인 서발한까지 올랐다. 하지만 247년 친동생 첨해왕의 왕위 등극 때 왜국 사신을 접대하며 “조만간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며 조롱한 게 문제였다. 왜왕이 군대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자 귀족들은 명분이 없다며 병력을 내놓지 않았다. 우로는 책임을 지겠다며 왜군을 찾아가 화형을 당했다.

중원대 종교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이자 동국대 국사학과에서 나당전쟁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국내외 사료를 인용해 신라시대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내물왕은 고구려와 손을 잡은 인물. 393년 왜군이 신라 수도 왕경(王京·경주)으로 진군하자 그는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고구려군은 신라 땅에서 왜군을 몰아냈다. 그는 중국 기록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최초의 신라왕이었다. 중국 송나라 때 백과사서인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신라왕 루한(樓寒)이 사신을 보내 선물을 바쳤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루한’이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의 ‘립간’이라는 것.

눌지왕은 고구려의 영향력을 떨쳐낸 왕이었다. 그는 417년 오촌당숙 실성왕이 자신을 살해하려 했을 때 고구려군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재위 기간 백제와의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아버지 내물왕이 도움을 받은 뒤 고구려군이 신라에 대거 주둔하며 간섭이 심해진 상황을 개선해야했기 때문이다.

500년 지증왕 즉위 기록은 신라시대 후궁의 아들은 왕위를 이을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임 소지왕에겐 후궁이 낳은 아들이 있었지만 왕위는 6촌동생 지증왕이 승계했다. 신라시대 혼례로 맺어진 부인이 낳은 아들이 아니면 제사에 참여할 자격도, 대를 이을 수도 없었다.

당나라와 손잡은 태종무열왕, 신라 왕으로는 유일하게 혼례의식을 기록에 남긴 신문왕, 중국 천문학을 배우기 위해 국비유학생으로 당나라에 간 김암 등 신라인의 이야기를 소설처럼 묘사했다.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웅진닷컴)은 신라 시조인 혁거세왕부터 56대 마지막 왕인 경순왕 때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사위가 왕위를 잇고 여왕이 존재하는 등 고구려나 백제와는 다른 풍습과 생활 방식을 지녔던 신라 왕조의 흐름을 쉽게 풀어냈다.

‘황금의 나라 신라’(김영사)는 고분의 황금 유물로 대표되는 신라의 공예문화를 고고학적 시각으로 보여준다. 황금 문화의 상징인 금관의 역사, 고분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금 공예품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신라의 생활과 문화를 전해준다.

‘신라 속의 사랑, 사랑 속의 신라’(경인문화사)는 신라 여성들의 삶과 사랑을 통해 신라 역사를 들여다본다. 왜구가 죽인 남편의 복수를 실행한 우로의 부인, 원효와 혼인한 요석공주 등 21명의 여성 이야기를 신라사학회 연구자들이 재구성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