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막기증 서약 또 서약… 그래도 사랑실천 부족하다 하셔”

  • 입력 2009년 2월 19일 02시 58분


한마음한몸운동본부 본부장인 김용태 신부가 장기기증과 에이즈 환자 돕기에 적극적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을 회고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한마음한몸운동본부 본부장인 김용태 신부가 장기기증과 에이즈 환자 돕기에 적극적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을 회고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원로 조각가 최종태 선생이 17일 낮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의 공덕으로 조성된 서울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관세음보살상을 둘러보고 있다. 김미옥 기자
원로 조각가 최종태 선생이 17일 낮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의 공덕으로 조성된 서울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관세음보살상을 둘러보고 있다. 김미옥 기자
18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자신의 이발관에서 이흥억 씨가 그동안 봉지에 담아 모은 김수환 추기경의 머리카락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훈구 기자
18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자신의 이발관에서 이흥억 씨가 그동안 봉지에 담아 모은 김수환 추기경의 머리카락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훈구 기자
■ 金추기경과 나

김용태 한마음한몸운동본부장 “장기기증 자선단체 만드신 후 솔선수범”

“지난해 10월 추기경님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됐을 때였습니다. 추기경님이 의식을 회복하자 의료진이 물었지요. 전에 말씀하신 대로 기증하시겠느냐는 얘기였습니다. 기력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분명하게 기증 의사를 다시금 확인하시더군요.”

김 추기경이 ‘뇌사 시 안구각막 기증’ 의사를 처음 밝힌 것은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 때였다. 대회를 계기로 충만해진 천주교의 사랑의 정신이 이웃으로 전해지도록 하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만든 단체가 장기기증과 해외원조 사업 등을 전담하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자선단체인 한마음한몸운동본부.

본부장을 맡고 있는 김용태 신부가 기억하는 김 추기경은 나눔과 생명사랑을 실천하며 솔선수범을 보여준 성직자였다. 18일 김 추기경의 빈소가 차려진 명동성당 옆 가톨릭회관에서 만난 그는 생생한 옛 기억들을 되살려냈다.

“추기경께서 당시 ‘뇌사 시 안구각막 기증’ 의사를 밝힌 것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때(1989년) 각막 기증을 서약하신 뒤에도 2005, 2006년 서울대교구 차원에서 성체대회를 열면서 전체 성직자를 대상으로 뇌사 시 장기기증 서약을 받으면서 다시 한번 그 서약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때 250여 명의 성직자가 장기기증을 서약했지요.”

김 신부는 김 추기경이 한마음한몸운동본부와 함께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미혼모 자녀 입양기관인 성가정입양원을 만든 일도 소개했다. 추기경은 엄마가 아이를 낳고도 기를 수 없어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는 현실이 가슴 아파 국내에서 새 엄마와 아빠를 찾아주자며 국내 입양을 전담하는 기관을 만들자고 했다고 한다.

김 신부는 추기경이 소외된 이웃을 보살펴온 다른 일화도 소개했다.

김 추기경은 10여 년 전부터 추석 즈음 서울 모처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석해 왔다고 한다. 다른 행사들과 달리 김 추기경이 철저히 비밀에 부친 이 행사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으로 숨진 환자들을 위한 위령미사.

“추기경께서는 지난해엔 병세가 위중해져 거동하지 못하셨지만 그전까지 거의 빠짐없이 매년 미사에 참석하실 정도로 그들을 끔찍이 아끼셨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그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김 신부는 1997년경으로 기억했다. 당시 김 추기경은 가족과 사회에서 버림받는 에이즈 환자들의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뒤 몇몇 신부에게 몰래 비자금까지 쥐여 주며 그들이 쉬고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쉼터를 만들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서울 몇 곳에 쉼터가 생겨났다.

김 신부는 테레사 수녀와 얽힌 이야기도 전했다. 김 추기경은 입원했던 병실에 테레사 수녀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존경의 마음을 표시했다.

“김 추기경께서는 사랑을 실천하면서도 스스로 모자란다며 항상 아쉬워하셨습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원로 조각가 최종태 교수 “한국 교회미술 토착화 적극 지원하셨는데…”

원로 조각가 최종태 선생(77·서울대 명예교수·예술원 회원)은 고 김수환 추기경을 “한국 교회미술이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토착화할 수 있도록 적극 지지해 준 어른”이라고 평가한다. 성당이나 수도원에 가면 동글동글 모나지 않고, 단순하면서 간결한 한국인의 얼굴을 한 성상(聖像)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모두 김수환 추기경의 예술적 안목과 심미안 덕분이라는 것이다.

17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자택에서 만난 최 선생은 “참 착잡하다.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가 높았던 분인데….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한국 기독교 토착 미술은 존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지난해 가을 병석의 추기경을 면담할 때 찍은 사진을 내보이며 잠시 생각에 잠긴 선생은 “추기경님과 한참 동안 손을 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로 우리는 할 얘기를 다했다”고 했다. 그의 조각만큼이나 담백하면서도 함축적인 만남이었던 셈이다. 그러면서 추기경은 “내가 얼마 전 늦잠을 자느라 병상에서 아침 미사를 하루 걸렀는데 최 선생, 바깥에 나가서 추기경이 아침 미사를 빼먹었다고 소문내면 안 돼요”라고 농담을 해 모든 이를 파안대소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추기경이 병상에서도 남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조크를 한 것이다.

1980년대 김 추기경의 비서를 지낸 장익 신부(현 춘천교구장 주교)의 소개로 추기경을 알게 된 선생은 이후 12년간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 회장을 지내면서 추기경의 절대적인 후원 아래 전국의 유명 성당과 성지, 수도단체 등에 한국적 순교자상과 성모상 등 수백 점을 봉안했다. 서양인 형상의 성상 이외는 생각할 수 없던 시절이어서 신부 수녀 신도들이 최 선생의 작품을 낯설어하며 숙덕일 때 추기경은 “지금은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면 친숙해질 것”이라며 그들을 달랬다. 어떤 경우는 점심 식사 후 매일같이 들러 한참 동안 성상을 쳐다보는 것으로 ‘무언의 압력’을 넣기도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는 최 선생과 그의 작품을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2000년 4월 ‘무소유’의 법정 스님이 회주로 있는 서울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에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할 당시 김 추기경이 선생을 적극 격려해 준 사실은 천주교와 불교의 ‘아름다운 인연’으로 기록되고 있다.

법정 스님으로부터 불상 제작을 의뢰받은 선생은 김 추기경에게 “가톨릭미술가협회 회장을 지낸 사람이 그런 작품을 해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추기경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아무 거리낄 것이 없다. 잘 만들어 드리라”고 격려했다. 그러면서 추기경은 “일본에 천주교가 전파된 초기, 성모상이 귀해 천주교인들이 관세음보살상 한 귀퉁이에 작은 십자가를 표시하는 방식으로 감시의 눈을 피해 미사를 드렸다”는 일화를 들려주며 부담을 덜어 주었다.

이를 전해들은 법정 스님은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의 상징이자 중생의 재난과 고통을 구제해 주는 ‘자비의 어머니’로 천주교의 ‘성모마리아’ 같은 분”이라고 화답했다. 높이 180cm의 화강암 관세음보살상은 한국적 선과 머리에 쓴 보관(寶冠), 왼손에 품고 있는 백자 항아리 등 현대적 한국 조형미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따금 길상사에 들르는 천주교 신부 수녀 신도들은 “어, 우리 성모마리아님이 여기 계시네”라고 반기며 보살상을 향해 기도를 드리곤 한다. 길상사 보살상은 불교 신도와 천주교 신자를 전혀 구분하지 않는다.

최 선생은 “김 추기경은 성직자이자, 화해와 일치의 사도, 그리고 기독교 토착미술의 선각자였다”고 추모했다.

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28년간 이발 이흥억씨 “귀한 유품될 것 같아 23년째 머리카락 모아”

손바닥만 한 비닐봉지에는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담겨 있었다. 봉지 안에 함께 있던 메모지에는 ‘1986년 5월 17일 김수환 추기경 이발’이라고 쓰여 있었다. 박스 안에 빼곡히 끼워져 있던 봉지 속 머리카락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면서 검은색에서 회색에 가까워졌다.

18일 서울 성북구 삼선동의 한 이발소에서 만난 이흥억 씨(66). 1981년부터 지난해 설날까지 28년간 김 추기경의 머리카락을 잘랐던 이발사다. 당시 추기경 집무실을 청소하던 아내의 소개로 시작한 일이었다.

이 씨는 1985년부터 김 추기경의 머리카락을 모으기 시작했다. “추기경님의 머리카락을 보관해 놓으면 나중에 교인들을 위한 귀한 유품이 될 것 같다”는 손님의 제안 때문이었다.

김 추기경은 두 달에 세 번 이발을 했다. 그의 잘린 머리카락을 이 씨는 23년 동안 한 차례도 빠뜨리지 않고 보자기에 담아 왔다. 이 씨는 그렇게 모은 400여 개의 머리카락 봉지를 24일 서울대교구에 기증할 생각이다.

이 씨가 기억하는 김 추기경은 ‘과묵한 어른’. 이발사로서 김 추기경과 오랜 세월 인연을 이어오면서 나눈 대화는 “안녕하세요”, “고맙소” 딱 두 마디뿐이었다.

“명동에 있는 서울대교구로 이발을 해 드리러 가면 추기경님과 함께 숙소 화장실로 갑니다. 이발과 드라이까지 40분이 걸리는데 아무 말 없이 몸을 맡기셨죠. 늘 우직한 바위처럼 꼿꼿이 앉아계셨어요.”

이발 중이던 김 추기경의 머리 위로 천장의 전등이 떨어질 뻔한 적도 있었다. 전등 줄이 풀려 ‘철커덩’ 소리를 내며 김 추기경의 머리 바로 위까지 전등이 내려온 것. 화들짝 놀란 이 씨는 가위를 떨어뜨렸고 주변에 있던 비서수녀도 얼굴이 파래졌다.

이 와중에도 김 추기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 전등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이 씨가 선뜻 가위질을 시작하지 못하자 김 추기경은 “좀 놀랐겠어요. 계속 합시다”라고 했다. 천주교 신자인 이 씨에게 ‘하느님’ 같았던 김 추기경도 세월 앞에선 한 ‘인간’이었다. 몸이 쇠약해지면서 이발용 의자에 앉은 그의 키가 점점 작아졌다.

“허리가 굽고 어깨가 처지니까 추기경님의 머리 높이도 서서히 내려갔어요. 그래서 의자에 방석을 깔았는데 방석 수가 늘어갈 때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김 추기경은 지난해 설날 이발을 하고 얼마 뒤 병원에 입원했다. 그게 김 추기경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17일 오전 명동성당을 찾아 유리관 속 김 추기경을 다시 봤을 때 이 씨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28년의 인연이지만 늘 추기경님 뒤에서 거울로만 얼굴을 봤지 정면에서 바라본 건 그날이 처음이더군요.”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동아일보 이훈구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전영한 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