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래자식… 주둥아리… 젖비린내” 거침없는 어찰로 국정장악

  • 입력 2009년 2월 10일 02시 59분


9일 서울 성균관대에서 김문식 단국대, 안대회 진재교 성균관대 교수(왼쪽부터)가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어찰첩 일부를 공개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9일 서울 성균관대에서 김문식 단국대, 안대회 진재교 성균관대 교수(왼쪽부터)가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어찰첩 일부를 공개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정조와 비밀편지를 나누며 현안을 조율한 노론 벽파의 지도자 심환지(1730∼1802)의 초상화. 동아일보 자료 사진
정조와 비밀편지를 나누며 현안을 조율한 노론 벽파의 지도자 심환지(1730∼1802)의 초상화.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이번에 다량으로 발굴된 정조의 어찰(御札)은 ‘정조 독살설’이 허구라는 점을 드러냈다고 학계는 분석하고 있다. 또 정조가 그동안 성군(聖君), 호학(好學) 군주로 묘사됐던 것과 달리 은밀하게 신하들을 조종하는 데 능했고, 다혈질에 다변(多辯)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정조는 이 편지들을 보내면서 ‘불에 태워라’ ‘찢어버려라’라며 읽은 뒤 폐기하라고 지시했으나 심환지가 왕명을 어기고 보관함으로써 200여 년 만에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여러차례 털어놔

‘심환지와 대립 관계’ 재해석 필요할 듯

신하들과 편지교환 통해 여론-정보수집

沈 “폐기” 왕명 어겨 200여년 만에 햇빛

▽독살설의 진실=정조가 갑작스럽게 타계한 것을 둘러싸고 ‘독살당했다’, 더 나아가 ‘심환지가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왔다. 그러나 정조는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병으로 고생하는 처지를 여러 차례에 걸쳐 상세하게 밝힐 정도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갑자기 눈곱이 불어나고 머리가 부어오르며 목과 폐가 메마른다.”(1800년 4월 17일·이하 음력)

세상을 뜨기 13일 전인 1800년 6월 15일에 보낸 편지에선 “배 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고생스럽다”고 썼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정조가 마음의 불(火)을 잘 다스리지 못한 것이 사망의 근본적인 원인인 것 같다”고 해석했다.

역사학계는 이번 어찰로 인해 정조와 노론 벽파의 관계도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심환지는 그동안 벽파의 거두로서 정조에 맞선 인물로 알려졌으나 정조와 비밀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웠기 때문이다.

▽막후 정치의 대가=정조는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여론과 정보를 독점하고 신료들과의 다각적인 비밀편지 교환을 통해 ‘막후 정치’를 펼쳤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심환지로 하여금 상주(上奏·임금에게 말씀을 아뢰는 일)하도록 한 뒤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은밀한 관계’도 여러 건 나타난다. 1798년 10월 14일자 편지에서 사도세자를 모셨던 임위의 증직(贈職·죽은 뒤에 벼슬을 높여주는 것)을 사주하는 게 대표적 사례다.

“‘임위의 충성과 절개는 어두운 하늘의 별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융숭하게 보답하는 도리에 따라 증직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합니다’는 등의 말을 부연해 글을 짓는 게 좋겠다.”

정조가 다른 신하들에게도 비밀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남인계 거두 채제공에게 보낸 비밀 편지도 나왔으며, 외사촌 홍취영에게 보낸 편지 39점도 나왔다.

▽다혈질에 다변=어찰들은 정조가 다혈질이었다는 점도 보여주고 있다. 정조는 호론(湖論)의 대표인 한원진을 반대하는 젊은 학자 김매순의 행동에 흥분해 쓴 1799년 11월 24일자 편지에서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오경이 지났다”고 말한다.

편지에는 험한 말도 보였다. 심환지의 측근인 서용보를 ‘호래자식(胡種子)’이라 했고 “김매순이라고 하는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이 편지와 발문(跋文)으로 감히 선배들의 의논에 대해 주둥아리를 놀렸다”고 비난했다.

▽속담에 비속어도 자주 사용=정조의 편지는 구어체(口語體)에 가까웠고, 속담과 비속어를 자주 사용했다. ‘개에 몰린 꿩 신세’ ‘한 귀로 흘리다’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사안의 무게를 덜기 위해 ‘껄껄(呵呵)’이라는 의성어를 구사하기도 했다.

한문 편지 중간에 갑자기 한글을 쓰기도 했다. 1797년 4월 11일에 보낸 편지에서 정조는 “요사이 벽파가 (인사에서) 탈락한다는 소문이 자못 성행한다고 하는데…지금처럼 벽파의 무리가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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