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세 100만달러나 주고 출판권 가져오다니…

  • 입력 2009년 1월 22일 02시 55분


‘한국 출판계의 굴욕’

중소출판사 M사의 대표 김모 씨는 지난해 당한 일로 한국 출판계의 과당경쟁이 낳은 폐해를 실감하게 됐다.

그는 미국에서 나온 인문교양서 한 권을 발굴해 계약을 하려고 미국의 출판사에 연락했다. 출판사 측은 에이전시를 통해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한 출판사가 있다”며 선인세 인상을 요구했다. 김 씨는 “2001년에 나온 뒤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적도 없고, 유명 작가 작품도 아닌데 미국 출판사가 그렇게 배짱을 부리는 것은 한국 출판사들의 성향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책의 판권을 얻기 위해 달라는 대로 선인세를 지불하는 태도를 얘기하는 것이다.

한국 출판계의 이런 행태는 급기야 ‘선인세 100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문학수첩이 6월경 출간할 예정인 댄 브라운의 신작 ‘솔로몬의 열쇠’(가제)의 선인세로 100만 달러를 지급한 것이다. 해외 번역서에 대한 선인세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2만 달러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2000년대 들어 10만 달러, 20만 달러가 우습게 여겨지더니 지난해 ‘마지막 강의’의 64만 달러에 이어100만 달러까지 왔다”면서 “해외 작품에 선인세 10만 달러 이상은 안 주는 것을 불문율로 여기고 지키는 일본 출판계와 비교된다”고 말했다.

출판계에선 해외 번역서에 대한 의존이 커지면서 ‘국제 출판시장의 호구(虎口)’로 전락한 한국 출판계의 처지가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나온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국내 도서 발행종수 가운데 번역서의 비율이 1990년대까지 10%대이던 게 2000년대 들어 25% 선으로 늘었다”고 밝혔다. 번역서 가운데 미국과 일본 번역서의 비중은 70%대에 이른다. 백 연구원은 “번역 출판에 크게 의존하고, 지나치게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한국은 해외 저작권료를 가장 비싸게 내는 나라라는 인식이 만연하다”고 지적했다.

출판인들은 “치솟는 선인세도 문제지만 한국 출판계의 자존심이 추락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말한다. 박종만 까치글방 대표는 일본의 출판사들이 한국 출판사에 고압적인 태도로 돌변한 사실을 들며 “1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번역서를 낸다고 하면 고마워하던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직원 수를 묻고, 경영 상태를 따지기까지 한다”고 말했다. 출판계에선 최근 한 출판사 대표가 직접 일본 출판사를 찾아가 ‘면접’ 수준으로 자사의 상황을 설명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에이전트 경력 11년째인 A 씨의 이야기도 충격적이다. 지난해 하반기 일본의 한 유력 출판사가 한국의 출판사들에 ‘계약하려면 판매부수가 아니라 인쇄부수 기준으로 인세를 내겠다고 약속하라’는 요구를 해왔다는 것이다. A 씨는 “출판사들이 협심해서 이런 요구를 물리쳤어야 하는데 한 출판사가 경쟁사를 따돌리려는 욕심에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면서 “이제 해당 일본 출판사와 거래할 때는 모두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본에 주는 선인세도 크게 인상됐다. 주연선 은행나무 대표는 “1990년대까지 선인세가 100만 엔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이제는 조금이라도 이름이 알려진 작가의 경우 300만 엔은 평균이고 500만 엔 이상도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일본 출판사들은 더 나아가 ‘한글 제목과 표지 시안을 허락받으라’는 요구까지 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관례가 아닌 요구”라고 출판계 인사들은 말한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한국 출판계는 외국에 퍼주기만 하고 자체의 ‘생태계’는 자생력을 잃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기호 소장은 “100만 달러면 한국의 작가 200명과 계약할 수 있는 금액”이라면서 “출판사들이 국내 콘텐츠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국내 저자 발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 [동아닷컴 인기기사]"물건 값 너무 올라 베트남댁 힘들어요"

▶ [동아닷컴 인기기사]관능미에 숨 멎는 듯… 파격미에 정신 번쩍

[화보]‘한국의 안젤리나 졸리’ 모델 김미경

[화보]‘세계 최강’ 대한민국 해난구조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