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이 연구]<13>한국 박물관史전념 최석영 박사

  • 입력 2009년 1월 12일 02시 58분


윤완준 기자
윤완준 기자
일본에서 인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최석영(47·사진) 씨가 1999년 서울 경복궁 내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로 근무하기 시작했을 때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역사부터 제대로 알고 싶어 선배들에게 물었다.

“왜 국립민속박물관이 경복궁 안에 있을까요? 언제부터 이 자리에 박물관이 있었죠?”

답부터 말하면 국립민속박물관은 1966년 경복궁 수정전(修政殿)에 한국민속관으로 개관했다가 1975년 경복궁 건청궁 터의 옛 조선총독부미술관으로 옮겼고 1992년 지금의 자리에 개관했다. 그러나 그런 답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드물었다.

‘한국에서 근대박물관의 시작은 언제였을까? 국립박물관들은 어떤 역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을까?’

최 씨의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한국 박물관사 연구를 평생 과제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조선총독부박물관 시절 이후 관련 자료는 수북했다. 최 씨는 2001년 ‘근대한국의 박람회·박물관’(서경문화사)을 냈고 2008년 ‘한국박물관 100년 역사 진단과 대안’(민속원)을 펴냈다.

최 씨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지방 분관이 “자발적 조직이었다”는 일각의 추정이 잘못됐음을 밝혔다. 그가 새로 찾아낸 자료에 따르면 박물관 지방 분관은 철저한 관변 조직으로, 역사를 날조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 궁녀 3000명이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을 가진 충남 부여군 낙화암. 이곳에는 1929년 삼천궁녀를 추모하며 지었다는 백화정(충남문화재자료 제108호)이 있다. 그러나 최 씨가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사실과 다르다. 당시 부여 분관 책임자로 부임한 오사카 긴타로가 “일본 천황이 백제를 돕기 위해 장수 300여 명을 보냈으며 백제 함락 때 궁녀뿐 아니라 일본 장수의 부인들도 함께 떨어져 죽었다”며 이들을 추모하는 백화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박물관은 내선일체 정책의 이념을 만들어간 곳이었다.

최 씨는 박물관 역사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박물관 정책이 많다고 말한다. 인류학 연구의 산실인 민족(民族)박물관이 없다는 사실이 대표적이다.

“1949년 국립민족박물관이 개관했는데 6·25전쟁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통합됐어요. 인류학 연구의 전통을 국립중앙박물관이 계승한 셈인데, 국립중앙박물관이 고고미술에 치중하면서 인류학이 외면받았습니다.”

일본은 천황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천황 역사와 관련된 공예와 예술품을 전시하면서 고고미술을 발전시켰다. 최 씨는 “한국 국립박물관들이 고고미술 연구에 치중한 것도 일제강점기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최 씨는 부쩍 바빠졌다. 2009년은 한국 근대박물관 100주년이 되는 해인 데다 최 씨가 한국 박물관사에 대한 거의 유일한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요즘도 5월 열리는 국제학술대회 ‘한국 박물관 100년과 그 후 100년의 과제’ 발표 준비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최 씨는 “박물관이 한국 근현대사에 미친 영향에 비해 학계의 관심은 거의 없다. 학과가 개설된 대학이 하나도 없는 게 방증”이라고 말했다. 2006년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국립민속박물관을 그만둔 최 씨는 현재 중앙대와 공주사대에 출강하고 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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