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지키기’ 부릅뜬 푸른 눈

  • 입력 2008년 12월 17일 03시 03분


미국인 바돌로뮤 씨 34년 살아온 동소문동 ‘재개발 반대’ 법정투쟁

“오래된 집 냉장고 버리듯 하는 곳 한국뿐

서울의 얼굴-역사 왜 없애는지 이해안가”

“오세훈 시장 한옥 보존 사업 추진에 기대감 커”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6가 일대는 좁다란 골목 양 옆으로 크고 작은 한옥이 많은 동네다. 이곳의 또 다른 이름은 성북구 동선 제3주택 재개발구역. 이곳에 있는 40여 채의 한옥은 재개발 바람에 묻혀 사라진 다른 한옥들과 같은 처지에 몰렸다.

하지만 동소문동 한옥에서만 34년간 살아온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60) 씨는 한옥 보존을 위해 1년여간 법정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는 1960년대 말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온 뒤 강원 강릉시 선교장에서 살 때 한옥에 매료됐으며 이후 남다른 ‘한옥 사랑’을 보여 왔다.

바돌로뮤 씨는 지난해 말 서울시를 상대로 재개발구역 지정 취소 소송의 대표 당사자가 돼 한옥 보존에 공감하는 주민 19명과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려면 20년 넘은 노후 불량 주택이 구역 전체의 60%를 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조사가 허술했다는 것이다.

바돌로뮤 씨는 “20년 넘은 집을 다 노후 불량 주택으로 낙인찍었다”며 “한옥처럼 오래된 집을 오래된 냉장고나 텔레비전 버리듯 취급하는 곳은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한옥 같은 옛것은 언제든 철거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3월에 첫 재판이 열린 이래 지금까지 8차례에 걸쳐 재판이 열렸고 내년 1월 중순 9차 재판을 앞두고 있다. 바돌로뮤 씨는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이 한옥 밀집 지역 중 재개발이 예정된 곳은 한옥 보존을 전제로 사업을 추진하도록 하겠다는 ‘한옥 선언’에 기대를 걸고 있다.

바돌로뮤 씨는 소송 전 주민들에게 한옥 보존 확인서를 받으러 돌아다닐 때 재개발 추진 업자들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했다. 협박과 욕설이 담긴 편지도 여러 통 받았다.

“‘어떤 외국인이 오래된 자기 집을 지키려 한국인의 재산권을 빼앗으려 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콘크리트 건물만 선진국답다는 발상이 씁쓸하더군요.”

선박 관련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는 그는 재판 참석 때문에 외국에서 잡힌 계약을 포기하기도 했다. 한국어에 능통한 그는 재개발 법규 관련 자료를 직접 뒤지고 서울시에 보낼 공문과 진정서를 만들었다. 한옥의 소중함을 깨닫고 소송을 지지하는 이웃 주민들이 십시일반 힘을 더한 덕분에 동소문동은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됐는데도 조합 설립을 위한 주민 동의(75%)를 받지 못해 미뤄지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서 동소문동 한옥은 1920, 30년대 지은 것이어서 가치가 떨어지고 살기 불편한 한옥에 미련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는 불만이 나올 때마다 바돌로뮤 씨는 직접 설득에 나섰다.

“그럴 때마다 잘 보존된 북촌 삼청동 한옥을 보여주며 말했죠. 그곳 한옥 중에도 우리 ‘한옥만큼’ 오래된 게 많다고, 우리 한옥처럼 조그마해도 깨끗하고 편리하게 가꿔놓았다고….”

바돌로뮤 씨는 한옥에 살고 싶어 하는 외국인이 많지만 언제 헐릴지 몰라 소개해주지 못했다며 30대 캐나다인은 한옥을 좋아해 재개발로 곧 철거될 걸 알면서도 마포구 아현동에 있는 한옥을 임차했다고 전했다.

“서울은 일산이나 분당 같은 신도시가 아닙니다. 왜 서울의 얼굴이며 역사를 없애는지…. 한국에 40년 산 내가 바보여서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박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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