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100년이 흐른들 광대 신명 어디 가겄소”

  • 입력 2008년 9월 18일 02시 59분


정동극장에 있는 이동백 명창의 동상 앞에 선 소리꾼 한승석 씨. 한 씨는 “예술에 대한 열정은 100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정동극장에 있는 이동백 명창의 동상 앞에 선 소리꾼 한승석 씨. 한 씨는 “예술에 대한 열정은 100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극단 미추, 한국 최초 新연극 ‘은세계’ 다시 불러내다

소리꾼 한승석-당시 이동백 명창 가상 대화

이 - 판소리 혼자 배워 무대에… 창극실험 주도

한 - 법대 재학중 국악에 심취… 고시공부 접어

이 - “새것 보여주자” 무대 서기 위해 3개월 연습

한 - 연극대본 일일이 판소리체로 고쳐 강행군

1908년 11월 15일 ‘은세계’가 서울 원각사에서 처음 막을 올렸다. 한국 최초의 신(新)연극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배우라는 개념이 없던 때여서 소리꾼들이 배우의 역할을 맡았다. ‘은세계’는 이듬해 재공연에 들어갈 정도로 호응이 컸다.

‘은세계’가 100년 만에 재조명된다. 정동극장과 극단 미추가 10월 3∼19일 ‘은세계’를 무대에 올린다(02-751-1500). 100년 전 작품의 재연은 아니다. ‘은세계’를 준비하고 공연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연극이다. 100년 전 ‘은세계’의 출연자들은 광대로 불렸다. 그 중 한 명은 명창 이동백(1867∼1950). 이번 ‘은세계’에서 이 명창 역을 소리꾼 한승석(41) 씨가 맡았다. 한창 연습 중인 한 씨와 그가 맡은 배역인 명창이 나누는 대화를 당시 신문 기사 등을 토대로 가상으로 꾸몄다.

▽한승석=대국창(大國唱)의 역할을 저 같은 또랑광대가 맡게 돼서 송구스럽습니다. 당시 원각사 공연이 성공적이었다는 기록이 많던데요.

▽이동백=원작 ‘은세계’는 구국의 일념을 품은 최병도가 탐관오리로 인해 죽음을 당하는 이야기요. 극중에서 최병도가 죽어 나가면 관객들이 안타깝다며 목에 엽전을 걸어줄 정도로 몰입이 대단했지. 관객들이 극 중간에 탐관오리에게 항의하다가 문밖으로 쫓겨나기도 했소(황성신문 1908년 12월 2일자).

▽한=12년 전 처음 무대에 섰을 때 생각이 납니다. ‘배비장전’ 하인 역을 하면서 “예이∼” 한마디를 제대로 못했어요. 얼떨떨하기만 했는데 자꾸 서다 보니 어느 순간 파겁(破怯)이 왔습니다. 이제는 무대에 오르면 관객 한 명 한 명이 보이면서 편안해집니다.

▽이=그게 무대 인생이지. 난 판소리를 자득해서 무대에 섰소. 판소리 집안에서 나질 않아서 독공해야 했지. 내가 활동했던 때는 1인 입창 판소리가 창극으로 바뀌던 때였소. 난 그걸 주도했지. ‘은세계’도 시대 변화에 대한 실험이었소.

▽한=저도 뒤늦게 판소리에 입문했습니다. 부모님 뜻대로라면 고시 공부를 했어야 했지만…(한 씨는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물놀이 동아리에서 활동하다가 국악을 업으로 삼았다). 왜 ‘광대’의 길을 선택했느냐고 물으면, ‘은세계’의 대본대로 ‘신명’이라고 할 수밖엔 없습니다.

▽이=‘우린 다 신명에 붙들려 놀아나는 사람들’이란 대사 말이군. ‘이 일에도 신명이 있을 거요.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온갖 억울하고 슬픈 얘기를 다 들었다가, 말 못하는 사정을 우리한테 대신 풀어달라고….’

▽한=요즘 매일 연습 중인데 연극 대본의 설명식 문장, 수식어 문구를 직접 판소리체로 고치고 있습니다. 글자 수도 맞춰야 하고, 음정과 박자도 염두에 둬야 하고…. 그야말로 강훈입니다.

▽이=그때도 무대에 서기 위해 3개월을 매일 연습했지(대한매일신보 1908년 12월 1일자). 모두가 열정적이었어. 이번 연극 대사대로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원각사는 오래 못간다. 지랄을 하든 발광을 하든, 어떻게 하든 이 극장은 지키고 싶은 거여’.

▽한=극장은 예술과 동의어일 겁니다. 100년 전 그 광대들의 새것에 대한 갈망은, 오늘날 전통을 지키려는 소리꾼과 다를지도 모르지만, 예술에 대한 치열한 열정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날짜가 다가오니 대본대로 관객을 모아볼까? 상등표 5만 원이오, 중등표 3만 원에 하등표 2만 원이오! 처소는 정동극장, 시간은 매일 오후 8시에 개하야 10시에 폐하겠소. 월요일은 공연이 없소! 술은 안 됩니다. 나중에 찾아가시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