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10년 日帝토지조사법 공포

  • 입력 2008년 8월 23일 03시 02분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침탈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토지조사 사업이었다.

한국의 땅을 지배하려면 한반도의 토지 소유 관계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야만 통제와 수탈이 용이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제의 움직임은 1910년 본격화됐다. 그해 3월 일제는 조선통감부에 토지조사국을 설치해 토지조사 준비에 들어갔다.

1910년 8월 22일, 비극적인 한일강제합방 조약이 체결됐다. 총리대신 이완용이 일제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의 왕에게 양도하는 문서에 서명한 것이다. 그 다음 날인 8월 23일, 일제는 토지조사법을 공포했다. 일제가 조선 침략을 얼마나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진행해왔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8월 29일 한일강제합방 조약이 공포되고 국권을 상실한 뒤 토지조사국의 사무는 조선총독부로 이관됐고 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토지조사를 전담했다. 토지조사법을 반포한 일제는 지적(地籍)장부 작성, 조선부동산등기령, 토지조사령, 조선임야조사령 등을 통해 토지 약탈의 음모를 하나 둘 진행해 갔다. 토지조사 사업은 1918년 11월 이완용의 토지조사 종료식 축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1918년까지 계속된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은 토지 소유권 조사, 토지 가격 조사, 지형지모(地形地貌) 조사 등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근대적인 토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지만 실은 한국의 식민지적 토지 소유관계를 공고히 하고 이를 통해 한반도의 토지를 약탈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주인 없는 땅, 신고되지 않은 땅을 국유화하고 이를 통해 식민통치 재정을 확보했다. 또한 전통적인 양반 계층을 식민지적 지주 계층으로 개편해 식민사회 기반을 구축하는 효과도 노렸다.

토지와 주거를 연결시켜 한국인의 동정을 살핌으로써 영구적인 식민통치 기반을 구축했고 동시에 세금 파악을 확실히 함으로써 수탈의 자료로 삼기도 했다. 일본인들의 한반도 정착에 필요한 토지를 확보하는 것도 숨겨진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

토지조사 사업으로 인해 실제 토지를 소유했던 수백만 명의 농민이 토지 소유권을 잃었고 조선총독부는 전 국토의 40%에 해당하는 전답과 임야를 차지하는 대지주가 되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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