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세상]하면 되디? 때론 실없이 웃자

  • 입력 2008년 5월 13일 02시 59분


《‘하면 되디’. 문을 열고 들어서면 벽에 걸린 액자가 반긴다. 서툴지만 정성스레 쓴 듯한 붓글씨를 보면 ‘풋’ 웃음이 터진다. 박정연의 ‘motto’ 시리즈. 온갖 표어가 난무하던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온 7080세대에게 익숙한 문구에 대한 재해석이다. ‘남자는 배, 여자는 가슴’이란 또 다른 작품은 가요를 패러디한 엉뚱한 발상으로 미소 짓게 한다. 》

23일까지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의 대안공간 충정각에서 열리는 ‘Artist's Wit’전은 이처럼 보는 사람의 허를 찌르는 상상력과 표현을 담아낸 작품을 선보인다. 음료용 빨대로 독특한 오브제를 창조한 홍상식, 담뱃갑으로 간담 로봇을 만든 이기일, 실제 사람이 사는 공간을 그가 가고 싶어하는 판타지의 세계로 구성한 사진 콜라주 작업의 원성원 등 모두가 신기하고 흥미롭다. 날선 풍자도 있다. 상표 라벨로 만든 오브제인 김지민의 ‘미키 폭탄’은 소비문화에 길들여진 현대를 고발한다.

한마디로 현대미술에 찍힌 ‘해독 불가’ 낙인을 떨쳐내고 유희정신으로 관객과 소통을 시도하는 전시다. “웃음을 유발한다는 면에서 유머와 비슷하지만 위트에는 반전이라는 극적인 요소가 숨어 있다. 반전은 예리한 시선으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관찰력과 반짝이는 재치 그리고 기발함에 의해 드러난다”(큐레이터 이은화). 100년 전 일본 문물의 쇄도 속에 독일풍으로 지어진 2층 저택을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겸한 서울 도심의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충정각. 그 자체도 시공간에 나름의 위트를 보탠 작품처럼 느껴진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랬다. 어느 한쪽으로만 기우뚱한다면 삶을 제대로 접근하는 방법이 아닐 것이다. 가끔은 무겁고 심각하지만 가끔은 가볍고 경쾌하게. 균형이 필요한 요즘 한국인에게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정신을 되찾는 기회는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29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3층에서 열리는 ‘크로스컬처, 만화와 미술’전은 순수미술과 대중문화의 접점을 통해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만화 이미지에 녹여낸 유머는 현대미술의 높은 벽을 허물고 관객에게 성큼 다가선다.

20∼50대의 작가 26명은 아톰 미키마우스 슈퍼맨 등 낯익은 이미지를 비틀어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펼친다. 돼지를 통해 ‘Are you happy?’를 묻는 여동현의 그림, 귀여운 동물 캐릭터를 활용한 노준의 작품은 편안하다. 스파이더맨과 루이비통 로고를 결합한 한상윤의 ‘스파이통맨’은 물질주의 세태에 대한 역설적 표현으로 익살스럽다.

웃음에는 물론 서글픈 웃음도 있다. 성태진의 목판부조 ‘거치른 들판으로 나가자’는 전설적인 태권브이의 이미지에 ‘88만원 세대’의 자화상을 포갠다. 생활인으로 몸부림치는 소시민 아톰이 나오는 ‘우주소년 아…부지’의 현태준. ‘웃어보려 해도/웃어보려 해도/웃음이 나오지 않아/거울 앞에 와서/물끄러미 바라보는/내 얼굴이여/평생이 한꺼번에/부끄럽구나’(김형영의 ‘거울 앞에서2’). 아톰에 넋을 잃었던 세대라면 초라한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듯한 공감이 느껴질 법도 하다.

감윤조 큐레이터는 “만화에는 당대의 사회적 이슈만이 아니라 노스탤지어, 꿈과 희망에 대한 성찰이 담긴다. 이러저러한 인간사에 대한 개별적 통찰이 독창적으로 풍자된다”고 지적한다. ‘처음부터 진리는 유희 속에 섞여 있었다’고 발터 베냐민이 얘기했듯 풍자를 위한 만화의 과장된 방식이야말로 본질에 가장 근접하는 방법이라는 것.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는 삶을 겁내지 않을 때 우리는 웃을 수 있다. 유머의 어원은 라틴어의 ‘습기’에서 왔다고 한다. 메마른 가슴이 아니라 물기 촉촉한 마음으로 삶과 사람을 유연하게 대할 수 있어야 유머를 즐기고 웃을 수 있다는 뜻인가. 오늘은 내가 먼저 웃어보기로 한다.

‘이제부터는 그냥/웃기만 하기로 했다/실성했다 해도/허파에 바람 들었다 해도/이제부터는 그냥/웃기만 하기로 했다/내가 가는 길/훤히 트이어 잘 보이므로’(허형만의 ‘가는 길’).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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