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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4월 1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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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사실상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근대 도시다. 근대 이전 ‘부산’은 없었다. 부산포라는 포구가 있었을 뿐이다. 조선 정부가 설치한 초량 왜관은 19세기 말 일본 메이지 정부에 의해 폐쇄됐다. 이후 등장한 일본인 전관거류지가 확대돼 20세기 초 시가지가 본격 형성된다. 1930년대에 부산진 공업지대가 형성되고 도시 종합계획이 수립된다.”
구모룡 한국해양대 교수는 최근 ‘인천학연구’ 8호에 기고한 ‘부산: 식민도시와 근대도시를 넘어서’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구 교수의 말처럼 부산이라는 지역의 정체성은 일제강점기 사회와 문화에 많은 빚을 졌다. 하지만 부산학 연구자이든 일반인이든 일제가 만든 부산의 기억, 일제강점기의 문화유산을 없애고 싶어 한다. 이런 풍토는 부산이란 도시의 다양한 측면을 훼손하고 부산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를 가로막아 왔다.
최근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 중심적 사고와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다원화된 관점에서 지역의 사회와 문화, 지역과 세계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새로운 지역학 연구, 로컬리티(locality) 인문학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면서 꾸준히 높아졌다. 하지만 기존의 지역학 또는 지방학은 다른 지역과의 연관을 고려하지 않은 채 특정 지방의 특수한 과거를 연구하는 향토사 연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새로운 지역학 연구자들은 지역학이 파편화된 연구를 넘어 세계와 소통하는 인문학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순천대 지리산권문화연구원,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원 등에서 이 같은 지역학 연구가 진행 중이다.
○ 로컬리티의 다양성
이상봉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국가나 중앙 중심의 근대적 패러다임으로 포착되지 않는 로컬리티의 다양성을 되찾는 게 새로운 지역학 연구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런 지역학 연구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국가적 학문 수준으로 봤을 때는 사소해 보이지만 지역의 시각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지식 체계를 발굴하는 것.
예를 들어 방언 연구의 경우 표준어의 관점에서만 이뤄져왔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방언의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국가 중심적, 중앙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면 지역은 새롭고 다양한 문화를 지닌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 장소가 접경 지역일수록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가 뒤섞여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부산의 국제시장 같은 대형 시장은 여러 지역에서 몰려든 상인들이 정착해 살아가면서 연고지의 정체성과 주거지의 정체성이 충돌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곳으로 새로운 지역학 연구자들의 의욕을 부추길 만한 주제다.
이 교수는 “이렇게 발견한 지역의 정체성을 세계 속의 다른 지역과 비교 연구하고 그 공통된 유형을 찾아내 보편화하는 것이 새로운 지역학의 목표”라고 말했다.
○ 중앙 중심 극복, 실용 학문의 가능성
새로운 지역학 연구는 지역의 다원성, 지역과 세계와의 직접 소통을 강조한다. 이는 중앙과 지방을 우열식으로 나누어온 잘못된 관행을 극복할 수 있다. 또한 ‘지금, 여기’를 강조함으로써 실용적 인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란 기대도 나오고 있다. 인문학자는 이제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 연구에서 벗어나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도움이 되는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천학연구원은 개항기 당시 인천의 사진자료를 축적한 뒤 이를 관광지 판매용 엽서 디자인으로 활용했다. 올해에는 인천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인천 사회의 재발견’이라는 대학 교재를 발간해 지역학 연구 성과를 대학 교육과 연계하고 있다.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는 영화도시 부산의 이미지에 기여하기 위해 1915∼1944년 ‘부산 지역 영화상영 목록’을 집대성한 자료를 출간할 계획이다.
○ 지역 구분 벗어난 소통의 지역학
순천대 지리산권문화연구원과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원이 함께 진행 중인 ‘지리산권 문화 연구’는 영호남 지역 구분을 뛰어넘는 새로운 지역학의 가능성을 보여줘 주목된다.
홍영기 순천대 지리산권문화연구원장은 “지리산은 영호남의 유학이 만나 교류한 곳이자 유교 불교 민속신앙이 어우러졌으며 현대에는 이념 갈등의 장으로 다양한 문화와 이념이 맞서고 융합한 문화권”이라고 말했다. 개항장이 외국 문물을 맨 먼저 접한 접경지대라면 지리산은 지역 간 문화를 서로 주고받은 접경지역인 셈이다.
최석기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원장은 “그럼에도 호남학과 영남학으로 나뉘어 따로 연구돼 온 탓에 영호남 문화가 혼합된 지리산권 문화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지리산권문화연구원은 지리산이 역사적으로 전국 지식인들로부터 현실의 한계를 극복할 ‘이상사회의 전형’으로 여겨져온 양상을 추적한다. 경남문화연구원은 영남의 남명학과 호남의 기호학이 지리산에서 어떻게 교류해 서로 영향을 미쳤는지를 연구 중이다.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리산을 명산으로 숭배한 신앙과 사상의 정체를 규명한 뒤 이를 중국 타이산(泰山) 산, 화산(華山) 산, 숭산(崇山) 산, 일본 후지(富士) 산 등의 문화와 비교 연구해 나가기로 했다.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는 한 국가에서 가장 먼저 외래문화를 받아들인 ‘접경지역 연구’를 부산 인천 목포 등 국내에 한정하지 않고 일본 요코하마(橫濱), 고베(神戶), 중국의 상하이(上海)는 물론 미국 유럽의 항구도시까지 확대해 다양한 문화의 갈등과 혼합 양상을 살필 계획이다.
인천대 인천학연구원은 지난해부터 ‘동아시아 지역학 세미나’를 열어 지역학 연구의 성과를 중국 일본 연구자들과 공유하고 있다. 올해 8월 열리는 2회 세미나는 ‘개항도시의 문화’를 주제로 인천, 목포, 베트남 하이퐁, 대만의 항구도시 등 근대 아시아 개항도시의 특징을 비교한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다른 나라의 ‘지역학’ 경향은
日 지역 관광사업 활용
中 상하이 중심 활성화
佛 지리적 문화권 강조
일본 지역학 연구의 특징은 지역학 연구를 지방 정부가 주도한다는 점.
“지방 정부 연구기관이 도시 하드웨어와 인프라스트럭처 개발 연구에 치중해 지역 역사와 문화 연구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한”(김창수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한국과 상황이 크게 다르다.
일본의 지역학은 지역의 자연, 역사, 문화에 대한 학제 간 연구를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를 지역 개발의 바탕으로 삼는 실용적 측면이 강하다.
김 연구위원은 “작은 마을이나 도시까지 역사는 물론 현재 문화에 대한 연구가 잘돼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지역학 연구의 성과를 대학과 시민단체 등이 주도하는 평생교육센터를 통해 지역 주민에게 서비스하는 체계가 돋보인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지역의 역사, 문화를 집중 공부한 뒤 자격시험을 거쳐 문화예술관광 해설사 등으로 활동한다. 지역학 연구가 지역 관광사업의 소프트웨어가 되는 셈이다.
중국은 내륙 지방의 경우 국가주의 정책이 강해 지역 연구가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상하이 같은 항구도시는 근대 개항 이후 이질적인 서구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지역학 연구가 활성화돼 있는 편이다.
유럽은 일상사를 바탕으로 한 지역 연구가 활성화돼 있다. 프랑스의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이 주도한 아날학파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아날학파는 정치, 국가체제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삶과 지리적 환경의 관계,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이 지정학적으로 주변 세계에 미친 실제적 영향을 기술했다.
브로델의 대작인 ‘지중해’는 순천대 지리산권문화연구원과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원이 함께 진행하는 ‘지리산권 문화 연구’와 마찬가지로 지중해를 국가 경계로 나누지 않고 하나의 지리적 문화권으로 파악해 지중해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연구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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