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존엄했던 난민의 生 한국소설 새 캐릭터를 낳다

  • 입력 2008년 3월 21일 02시 58분


■ 소설가 김원우씨 새 장편 ‘모서리에서의 인생독법’

‘그 쏠쏠한 수익업체를 교정전문가인 제 아내에게 떠넘긴 모도리(빈틈없이 야무지고 이해에 밝은 사람) 만혼. 발밭고(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이용하는 소질이 있다) 엽렵해서(슬기롭고 민첩하다) 능준하지만(표준 이상으로 넉넉하다) 받침잔에다 종이 손수건을 꼭 깔아서 들고 올 정도로 눈비음(남의 눈에 들도록 겉으로 꾸미는 일)이 좋은 아내를 데리고 사는 사내. 요컨대 안팎이 다 김바리(약고 꾀가 많은, 이익을 내다보며 남보다 앞질러서 차지하려는 사람)임은 틀림없는데….’

김원우(61) 씨의 소설을 읽는 것은 힘겹고도 즐거운 경험이다. 이 작가가 벌이는 말의 잔치는 수시로 사전을 들춰보게 하지만, 우리말이 이렇게 풍요로웠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 놀랍다. 새 장편 ‘모서리에서의 인생독법’(강 출판사)도 그런 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성취는 우리말 구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작가가 만들어낸 한 인물은 “지금까지의 한국 소설 어디에서도 그 비슷한 경우를 찾을 수 없는 개성의 인물을 통해 성격 창조의 한 모범을 보였다”(평론가 정호웅)는 평을 끌어낼 만큼 독특하다. 대구 계명대의 연구실에서 종일 지내는 김 씨는 그러나 20일 통화에서 “고만고만한 사람”이라고 잘라 말했다.

소설 속 박성득이라는 인물을 가리키는 얘기다. 삼팔따라지 월남민 의사인 박성득은 미수(米壽·88세)를 넘기고 세상을 떴다. 소설은 유족과 후학들의 증언을 통해 박성득의 삶을 복원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좀처럼 말이 없고, 단사호장(簞食壺漿·변변치 못한 음식)의 식사에, 생활이 알뜰하고, 믿는 것은 오로지 칼 실력뿐인 외과의는, 김 씨의 말처럼 ‘평범한 중산층’의 모습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인물이 소설 안으로 들어와 굴곡진 한국 현대사와 만나면 평범할 수 없는 캐릭터가 된다.

“평범하게 고향에 살 수 있었을 사람이 전쟁으로 한순간에 난민이 됐어요. 포자식물처럼 떠돌다가 낯선 곳에서 뿌리를 내려야 할 때 이 평범한 사람은 어떤 생존 방식을 택할 것인가. 나는 이 ‘난민의 시대’에 인간의 위엄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사실 난민이란, 전 세계적인 현상 아닌가요. 우리나라의 외국인 노동자 문제도 그렇고.”

작가는 박성득의 ‘과거의 구멍 뚫린 부분들’을 다 채우지 않고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주변 사람들이 언제든 적으로 바뀔 수 있음을 알고 ‘숨은 꽃처럼 살아가는’ 박성득의 모습은, 전쟁이 한 소시민을 얼마나 상처 입혔을지에 대한 독자의 상상을 폭넓게 자극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 드러내 말하지 않고 오로지 생업에만 철저하게 매달린 박성득의 모습은, 작은 것도 크게 말하길 좋아하는 소란스러운 요즘 세태와 대비된다. 김 씨의 소설에는 이런 날선 문제의식이 있다.

작가 스스로가 난민의 삶을 살아왔다. 경남 진영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 통에 피란을 다니다가 대구에 자리 잡았다. 대학을 마친 뒤 서울에서 직장을 잡게 되어 “최선을 다해 서울 사람이 되고자” 살았다. 1999년 계명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부임해선 다시 대구로 옮겨와 “활착하는” 시간을 보냈다. ‘생업에 매진하면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한’ 박성득의 모습은 작가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서리…’와, 함께 낸 산문집 ‘산책자의 눈길’은 그 인간 존엄의 발현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