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하지 마라… 독립선언서는 지금도 외친다

  • 입력 2008년 3월 1일 03시 21분


‘21세기에 더 유용한’ 선언서의 가르침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서 낭독된 기미독립선언서(최남선 기초)는 단순히 민족의 독립만 외친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나아갈 바와 세계사적 보편 가치를 선구자적 시각으로 명시하고 언명함으로써 오늘날에도 그 가치가 빛난다. 문인구(84) 3·1문화재단 이사장, 역사학자 이태진(65) 서울대 교수, 사회학자 박명규(53) 서울대 교수, 정치학자 김용직(49) 성신여대 교수의 설명을 통해 오늘날에도 되새겨야 할 기미독립선언서의 가치를 5가지 키워드로 분석했다.

박 교수는 “선언서는 ‘21세기에도’ 유효한 정신일 뿐만 아니라 ‘21세기에 더욱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했고, 김 교수는 “예지에 가까운 시적 언어로 시대정신을 표현한,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세계에서 활동하는 젊은이들이 생생한 정신적 모토로 삼을 만하다”고 했고, 문 이사장은 “국가, 사회, 개인 생활에서 하나의 기준으로 삼기에 충분하다”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1 미래지향적 개혁주의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미(기미)된 日本爲政家(일본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광정)하야…(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에 희생된 불합리하고 부자연에 빠진 이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선언서는 낡은 관념과 폐단을 개혁하고 서구적 근대사상인 민권을 도입하려는 계몽주의 정신을 강조했다. 시시각각 급변하는 세계 문명사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선진 정치, 경제, 문화, 교육제도를 적극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밝은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것이다.

선언서는 도산 안창호의 무실역행 사상(실력양성론)의 영향을 받았다. 도산의 사상은 무력투쟁 못지않게 미래를 위해 민족의 새로운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 과거의 영광이나 관행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잘못을 고쳐 가는 실용주의 사상과 닮았다.

2 열린 민족주의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전)을…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할 機緣(기연)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ㅣ뇨(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을…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3·1운동 지도자들은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민족 생존권을 위협한다고 강조했다.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민족주의의 발로인 셈이다.

선언서는 그러나 민족의 자존만 중시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민족의 존엄과 영예가 손상돼 민족이 세계 문화에 이바지할 기회를 놓쳤다고 안타까워했다. 편협한 자민족 중심주의에 빠지지 않고 열린 민족주의로 승화한 것이다. 이는 과학기술,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서의 성취를 세계에 펼쳐 보여야 할 21세기 정신과 맞닿아 있다.

3 글로벌 평화주의

“朝鮮獨立(조선독립)은…東洋平和(동양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를 삼는 世界平和(세계평화), 人類幸福(인류행복)에 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조선의 독립은…동양 평화를 그 중요한 일부로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선언서는 조선의 독립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와 전 인류의 공동 생존권과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약소민족의 희생을 담보로 한 팽창주의에서 벗어나 국민이 주인 된 공화국들 간의 평등한 체제를 바탕으로, 국제규범을 준수하는 세계 체제의 탄생을 예견한 것이다. 서구 열강국은 제2차 세계대전 뒤에야 국제법을 바탕으로 유엔을 탄생시켰다.

한중일 3국은 역사 인식의 차이로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평화가 세계 평화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선언서의 가르침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다.

4 적대주의 지양

“日本(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락(탁락)한 民族心理(민족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놀랍게도 선언서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적대적 비난은 찾아볼 수 없다. 일제 강점으로 인한 절망적 상황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을 침략한 자들까지 용서하고 함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선언서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그것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념으로 편을 갈라 상대를 헐뜯는 독설이 난무하는 시대가 부끄러워지는 대목이다.

5 천부인권 보편가치 목표

“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하고, 人類通性(인류통성)과 時代良心(시대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호원)하는 今日(금일)…(2000만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어 굳게 결심하고 인류 공통의 옳은 성품과 이 시대를 지배하는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라는 무기로 도와주고 있는 오늘날…).”

기미독립선언서 곳곳엔 천부인권인 자유, 평등, 정의, 합리주의, 인도주의에 대한 신념이 잘 나타나 있다. 선언서는 일제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정신일 뿐 아니라 개인의 자연권 회복을 선언한 선진적 사상이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앞서 재일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발표한 2·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침략이 “참정권, 집회 결사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를 불허하며 심지어 신교의 자유, 기업의 자유까지 구속했다”고 비판했다. 그 보편적 천부인권의 정신이 기미독립선언서로 이어진 것이다.

도움말 주신 분: 문인구 3·1문화재단 이사장,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용직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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