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삶에 대한 경외’ 건반을 울리다

  • 입력 2008년 1월 24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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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밤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회를 연 피아니스트 서혜경. 사진 제공 크레디아
22일 밤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회를 연 피아니스트 서혜경. 사진 제공 크레디아
■ 유방암 극복하고 무대 돌아온 피아니스트 서혜경

서혜경이 마주한 것은 피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운명이었다.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찬 피아노의 눈물, 이를 위로하는 현악기와 목관악기의 처절한 울음소리, 그리고 이러한 모든 아픔을 극복해 내려는 강한 의지…. 쩌릿쩌릿해 오는 오른팔을 주물러 가면서도 서혜경은 연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연주가 끝난 후 귀고리가 떨어진 것도 모를 정도였다.

지난 1년간 암과 투병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던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22일 밤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컴백 무대를 가졌다. 항암치료 탓에 짧은 헤어 스타일과 날씬해진 몸매로 등장한 그는 KBS교향악단과 함께 라흐마니노프의 2번, 3번 협주곡을 잇달아 연주했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은 엄청나게 긴 데다 테크닉이 필요한 곡이어서 피아니스트들에게 ‘악마의 곡’으로 불리는 곡. 특히 3번 협주곡은 영화 ‘샤인’에서 비운의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이 치다가 미쳐 버리는 난곡 중의 난곡이다.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고 1년간 수술과 항암치료, 방사선치료와 우울증까지 불굴의 의지로 극복해낸 서혜경이 과연 1시간 25분 동안 두 개의 협주곡에 담긴 7만 개의 음표를 어떻게 요리할지 관심거리였다.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온 서혜경은 오히려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는 세포가 분열하고 증식하듯 무한대의 음악적 상상력으로 표출되는 라흐마니노프의 3번 협주곡을 즐기듯 차분하게 풀어갔다. 오른손의 테크닉은 완벽해 보이지 않았지만 여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내뿜는 연주로 더욱 큰 감동을 주었다. 특히 카덴차와 프레스토 부분에서는 불과 석 달 전까지 방사선치료를 받던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넘쳤다.

“예전에는 무대에서 피아노를 열 때 88개의 건반이 상어 이빨처럼 보였어요. 그러나 이제는 서핑을 하듯 파도를 타는 법을 배웠어요. 스트레스 없이 즐길 수 있는 공연은 처음이었습니다.”

그에게 ‘즐기는 연주’는 생존의 조건이다. 스트레스는 암 재발의 가능성을 키우기 때문이다. 이날 서혜경은 “내게 생명을 다시 주고,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해준 서울대 노동영 교수에게 이 곡을 바친다”며 쇼팽의 ‘야상곡’을 앙코르로 연주했다. 무대의 조명을 전부 끈 가운데 ‘야상곡’이 연주되는 동안 교향악단 단원 중에 일부는 눈물을 흘렸다.

유방암 때문에 림프샘을 절제한 서혜경은 연주할 때 오른손이 약간씩 쩌릿쩌릿하다고 했다. 그가 두 번째 앙코르로 선보인 곡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꿈)’. 그는 “객석에 암 환자들도 꽤 많이 왔는데 ‘완치의 꿈’을 연주해 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혜경은 연주회 뒤 오른손에 압박붕대를 하고 사인회를 가졌다. 같은 병을 겪은 한 여성 관객은 “당당한 모습이 너무도 큰 힘을 준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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