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왕이 바뀌면 수도를 옮겼다, 왜?

  • 입력 2007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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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화사/정옥자 외 지음/전 2권·각 424쪽, 462쪽·각 권 2만500원·일지사

조선의 태조는 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또 그 정궁으로 경복궁을 창건했다. 그런데 아들인 태종이 전권을 장악하면서 수도는 다시 개성으로 옮겨갔다. 얼마 후 다시 한양으로 천도했지만 태종은 경복궁을 놔두고 새로 지은 창덕궁에서 통치를 펼쳤다.

왜 그랬을까. 동양정치의 특징으로서 묘한 ‘공간의 정치’가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충선왕이, 부왕인 충렬왕이 건설한 여러 이궁을 모두 철거한 뒤 정궐을 중창하고 자신의 이궁으로서 연경궁을 세운 것은 부왕의 정치노선에 대한 비판 의지를 가시화한 것이었다. 태종은 이를 염두에 두고 자신의 집권을 승인하려 하지 않았던 부왕에 대한 일종의 견제와 회유의 하나로 수도정비사업을 펼쳤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27명의 왕 중에서 6명(22.2%)의 능이 동구릉 한곳에 조성된 이유는 무엇일까. 건국시조 태조의 건원릉이 조성돼 풍수지리적으로 뛰어난 데다 가능한 한 부친의 무덤이 있는 곳에 묻히려는 후대 왕의 의지, 한곳에 모아서 관리가 용이한 점, 사대부의 무덤이 소실되는 것을 막으려는 신하의 의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한국뿐 아니라 조선에도 국시(國是)가 있었다. 선조 이후 붕당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공론(公論) 대결이 치열해졌는데 군주가 그 시비를 판정한 것이 국시가 됐다. 대표적인 것이 영조 대 신임의리였다. 신임의리란 영조의 형인 경종이 재위하던 1721년 신축년과 1722년 임인년에 있었던 신임사화로, 영조의 정통성을 주장했던 노론의 4대신이 처형됐던 일에 대해 영조가 노론이 옳고 소론이 잘못이라고 판정한 것을 말한다.

흔히 이는 노론 신하들의 의리 때문에 영조가 즉위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돼 노론의 승리로 해석됐다. 그러나 이를 승인한 영조의 논리는 자신이 즉위한 것은 의리 논쟁과 상관없이 숙종-경종-자신에게 이어지는 삼종혈맥의 정당한 계승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정치 세력의 어느 손을 들어 준 것이 아니라 왕권 강화의 하나였다는 뜻이다. 국시는 당파를 넘어서 존중해야 했기 때문에 이를 위반하는 것은 역모로 다스려졌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것도 결국 국왕과 신하가 합의한 이 국시를 위반했기 때문이었다.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의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논총을 대신해 정 교수가 평소 내고 싶어 했던 ‘조선시대 문화사’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기획된 책이다. 정 교수의 논문을 포함 27편의 논문이 실린 이 책의 상권은 조선시대 문물의 정비와 왕실문화에 초점을 맞췄고 하권은 사대부의 사상에 초점을 맞췄다. 그중에는 송시열 송준길과 어깨를 나란히 한 노론의 이론가 이유태, 노론 출신임에도 정조를 성심껏 보필했던 유언호, 흥선대원군의 정적이었던 안동 김문 출신이면서도 그를 도왔던 김세균, 송시열의 9대손으로 을사늑약 폐기를 간언하며 자결한 조선의 마지막 산림(山林)으로 불린 송병선 등 흥미로운 인물이 여럿 포함돼 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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