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 입력 2007년 10월 2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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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 올해 1월 12일 오전 워싱턴 랑팡플라자 지하철역에서 45분간 길거리 연주회를 열었다. 악기는 350만 달러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였고 클래식을 6곡 연주했다. 지나간 사람은 1097명. 이 중 1분이라도 연주를 들은 이는 7명, 동전함에 돈을 넣은 이는 27명이었다. 그러니까 1070명은 연주자의 1m 앞을 그냥 지나쳤고, 모은 돈은 32달러를 조금 넘었다.

국내 펀드 시장을 개척한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대학생 시절부터 증권 투자로 유명했다. 그는 대학원에 다니던 1984년 ‘한국 증권시장에 대한 전망’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는데, 이것이 놀라운 적중률을 보여 회자됐다. 그런데 증권업계를 돌고 돌아 그의 손에 돌아온 그 보고서의 작성자는 일본 노무라증권이라고 돼 있었다.

벨의 이야기는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사이고, 박 회장의 일화는 ‘박현주 미래를 창조하다’라는 책에서 본 것이다. 두 사례 모두 우리가 안다는 것의 한계나 허구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에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눈이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신정아 사건 이후 여러 명이 학력 위조로 곤욕을 치렀다. 그들 중에는 취재를 인연으로 식사를 같이 하면서 대학 이야기를 한 이도 있었다. 그들이 뉴스에 오르내릴 때 필자는 ‘도대체 내가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내 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래(‘가시나무’)처럼 아무리 사람의 얼굴이 여러 개라고 하지만, 내 눈은 까막눈에 가까웠다.

우리는 이제 알기 위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와 실랑이를 해야 한다. 벨의 거리 연주나 박 회장의 보고서처럼 진짜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일도 다반사다. 특히 인터넷 시대에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일상에서 ‘가상’과 ‘가짜’의 구분도 애매하다.

이런 상황에서 진짜를 진짜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을 비롯해 가시적인 성과나 재능은 기본일 테고, 그 위에 ‘뭔가’가 더해져야 한다. 그 ‘뭔가’는 전문가의 평가나 주위의 평판, 권위자의 의견, 작은 소문 등 셀 수 없이 많다. 벨의 거리 연주회도 ‘벨’이라는 이름이 사전에 알려졌다면 붐볐을 것이다.

우리의 앎은 외부의 ‘뭔가’에 기대지 않고서는 온존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인에게 가면이 필요한 이유도 자기 앎의 한계를 모르는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문제는 그 ‘뭔가’가 보이지 않는 데다 누가 어떻게 더하느냐는 것이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조작이나 거짓에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 ‘카더라 통신’이나 ‘뒷담화’의 파괴력을 보라. 객관적 진실과 주관적 평판이 부닥칠 때 평판에 더 기울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렇기에 ‘까막눈’을 면하는 게 갈수록 아득하게 느껴진다. 제대로 된 인식을 위해 관련 사안들을 모으고 나누고 의식도 가다듬어야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불신(不信)’을 전제로 한 것이다. 저절로 앎에 이르는 경지도 있다지만 그런 ‘도사’를 본 적은 없다.

결국 ‘아는 게 부족하다’고 고개 숙이는 게 낫다. 진짜와 가짜의 거리가 종이 한 장도 되지 않는 세상에서는…. 그나마 그게 덜 팍팍한 삶인 것 같다.

허엽 문화부 차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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