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生의 또다른 기회인가

  • 입력 2007년 10월 1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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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교 ― 각성으로 윤회 쳇바퀴를 멈출 수 있는 기회

기독교 ― 죄의 결과인 동시에 영혼의 성령체험 기회

유 교 ― 조상과 후손을 정신적으로 이어주는 기회

인간의 가장 원초적 공포의 근원으로서 죽음은 전통적으로 종교의 영역에서 다뤄 왔다. 그러나 최근 참살이(well-being)에 이은 참죽음(well-dying)의 열풍 속에 죽음학이란 학문분야가 성립하면서 죽음이 인문학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왔다.

인문학 주간행사의 하나로 10∼13일 서강대에서 열린 ‘죽음과 죽어감 그리고 영성’에서는 죽음학에 대한 국내외 학자들의 다양한 발표가 이뤄졌다. 그중 기독교와 불교, 유교, 도교의 죽음관에 대한 발표는 죽음이 곧 삶의 문제와 직결돼 있음을 재확인해 줬다.

‘불교에서의 죽음’(류제동·성균관대) 발표문은 불교야말로 죽음의 문제를 가장 철저하게 대면한 종교라고 주장한다. 싯다르타의 출가 원인이 바로 아홉 살에 목도한 죽음의 사슬에 대한 강한 거부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 극복은 육체적 죽음을 수용하되 의식적 죽음에 저항함으로써 얻어진다. 그것은 세속적 욕망에 지배당하지 않는 깨어있음(각성)을 유지하는 것이며 윤회의 쳇바퀴를 멈출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죽음 이해’(박현준·서강대)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내용을 토대로 기독교의 죽음관을 소개했다. 기독교에서 죽음은 피동적이며 부정적 차원의 죽음과 능동적이며 긍정적 차원의 죽음이 존재한다. 전자는 죄의 결과로서 이뤄지는 죽음이며 후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얻어지는 죽음이다. 후자의 죽음은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성령의 체험을 통해 산자와 죽은 자의 친교(communio)가 가능해지는 우주적 공동체에 합류하는 것이고 전자의 죽음은 그와의 단절이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다.

‘유교와 도교의 죽음관 비교’(최수빈·서강대)는 독자적 내세관을 갖지 않은 중국적 전통의 죽음관을 다뤘다. 이들 종교는 모두 죽음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다만 유교는 삶의 연장선상에서 죽음을 담담히 수용한 반면 도교는 영생불사의 추구를 통해 이를 극복하려 했다. 두 종교의 죽음관에서 기독교의 그것과 유사한 측면도 발견된다. 조상과 후손이 정신적 도덕적으로 연계돼 있다는 유교의 사회적 영생관이 그렇고 죽음이 유전적으로 주어지는 근원적 죄악의 결과라는 도교적 발상이 그렇다.

불교와 기독교가 내세중심적이라면 유교와 도교는 현세주의적이다. 또한 불교와 도교가 죽음 문제에 대한 개체적 돌파를 꿈꿨다면 유교와 기독교는 그 집단적 극복을 꿈꿨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종교의 죽음관은 곧 이들 종교가 숨쉬는 문화권의 세계관과 연결된다. 역시 죽음과 삶은 둘이 아니라 하나(生死一如)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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