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껌 같은 관계… 뱉고 나도 침이 고이네

  • 입력 2007년 10월 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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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애란 씨. 전영한 기자
소설가 김애란 씨. 전영한 기자
◇침이 고인다/김애란 지음/312쪽·1만 원·문학과지성사

낯선 사람을 알아 갈 때 우리는 본래 모습보다 좀 더 과장한다. 손짓도 크게, 웃음도 크게. 2005년 ‘달려라, 아비’ 때 김애란(27) 씨는 그랬다고 했다.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로 문단을 발칵 뒤집어 놓은 김 씨. ‘이상하게 잘 쓴’ 소설을 들고 나와 독자들을 화들짝 놀라게 한 지 2년 만에 그는 ‘2집’을 내놨다. 계절마다 한 편씩 청탁받은 8편 단편을 묶었으니, 문단 최연소층인 이 1980년대생 작가가 그간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았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동안 많이 변했다. 명랑만화 같은 얼굴과 잘 어울리는 재미있는 표정을 카메라 앞에서 지어 보이던 이 작가는,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나긋나긋하고 조심스러워졌다. 펑키 스타일의 머리도 차분한 단발로 바뀌었다. 그 무엇보다 변신한 것은 그의 소설이다. 웰메이드 유머가 강렬했던 첫 소설집과 달리 ‘침이 고인다’는 ‘소박해졌다’. 부족하다는 게 아니다. 작가의 목소리는 가라앉았지만 그래서 한결 부드럽게 들린다. 그의 시선은 낮아졌지만 그래서 더욱 따뜻하다. “독자를, 소설을 알아 가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담담하고 편안한 마음”이라는 작가의 말이 떠오르는 부분이다.

집안 형편에 어울리지 않게 피아노 레슨을 시킨 엄마. 그렇지만 갑작스레 빚더미에 올라서 이사를 해야 한다. 단편 ‘도도한 생활’의 배경은 피아노가 애물단지가 돼 버린 반지하다. ‘성탄특선’의 연인은 성탄절 밤을 보내고 싶어도 돈이 없어 이주노동자가 가득한 여인숙에 들어간다. 이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공간은 허름하기 이를 데 없지만 작가는 구질구질한 배경을 모자라지 않게 묘사하면서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의 무늬를 구질구질하지 않게, 담백하고 차분하게 그려 내고, 지나친 연민을 부르지 않으면서 ‘그저 우리와 같은 땅에 사는 한 사람’으로 이해하게 한다.

표제작 ‘침이 고인다’의 주인공 ‘그녀’는 하룻밤 재워 달라고 찾아온 후배와 얼떨결에 동거하게 됐다. 엄마가 시립도서관에서 어린 후배에게 껌 한 통을 주고 떠났다는 얘기는, 후배와 살게 된 첫날밤 듣기엔 영 편치 않은 회고다. 여기에다 그때 남은 하나의 껌이라며 후배는 껌 반쪽을 찢어 줘서 그녀를 더욱 불편하게 한다.

‘그날 이후로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할 때는 말이에요. 껌 반쪽을 강요당한 그녀가 힘없이 대꾸했다. 응. 떠나고 떠나가며 가슴이 뻐근하게 메었던 참혹한 시간들을 떠올려 볼 때면 말이에요. 응. 후배가 한없이 투명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요.’

자신의 기호, 차림새, 습관까지 닮아 가는 후배가 갈수록 부담스러운 그녀는 어느 날 후배를 집에서 쫓아내고야 만다.

이 이야기는 물론 관계에 관한 것이다. 관계를 갈구하는 후배와, 후배를 이해하기 힘든 그녀를 김 씨는 나직한 목소리로 세밀하게 묘사한다. 당신이 견딜 수 없는 상대의 상처를 그저 인정해 달라고, 알아주기만 해 달라고 작가는 간곡하게 부탁한다. 소설집의 제목을 ‘침이 고인다’로 달아 놓은 이유도 헤아려진다. ‘침이 고인다’는 쿨한 요즘 책 제목들과 달리 끈적하지만 그것은 작가가 독자에게 직접 건네는 말이어서 의미 있다. “책을 읽는 당신과 헤어지려 할 때 나(작가)는 침이 고인다”고.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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