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풍경]출판사의 무섭고 고마운 손님 황치영 할아버지

  • 입력 2007년 10월 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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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말 서울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 옆 이지출판사 사무실로 초로의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손에는 이 출판사에서 나온 ‘한 지리학자의 아리랑 기행’이라는 책이 들려 있었다. 미국 유타대 명예교수인 원로 지리학자 이정면 씨가 쓴 책이었다. 할아버지가 출판사를 찾은 까닭은 책 속의 외래어 표기, 맞춤법, 중국과 일본의 지명 등 오류를 지적해 주기 위해서였다.

이지출판의 서용순 대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떠올렸다.

“엄청나게 혼났습니다. 표기가 잘못됐다고 말이죠. 이튿날 할아버지는 책 곳곳의 틀린 부분을 바로잡은 뒤 포스트잇까지 쫙 붙여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뒤에도 출판사를 자주 찾았다. 많게는 일주일에 서너 차례, 지금까지 스무 번 정도 사무실을 방문했다. 서 대표의 말.

“할아버지가 사무실에 들어오시기만 하면 또 무슨 지적을 받을지 벌벌 떨립니다. 특히 외국 지명이나 인물 표기에 정통하신데 얼마 전 중앙아시아 관련 책을 낼 때는 정말 많이 신경 쓰게 되더라고요. 독자가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이제는 그분께 무척 감사한 마음입니다.”

‘할아버지’는 서울에 사는 60대의 황치영 씨. 자신에 대한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아 자세한 이력을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우리말 표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략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던 당시, 컴퓨터 분야 책들을 보면서 표기에 오류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부터 출판사를 직접 찾아가 표기의 오류 등을 지적해 주었다고 한다.

지난해 말, 황 씨는 서울의 마음산책 출판사를 찾았다. 정은숙 대표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모르는 할아버지가 불쑥 들어오셔서 사장을 만나야 한다고 하시기에 처음엔 놀랐습니다. 혹시 뭘 요구하러 왔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옆방으로 도망갔죠. 거기서 벽에 귀를 대고 얘기를 들어 보니 우리 책의 색인이나 한자 틀린 것을 지적해 주시더군요. 백과사전의 오류까지 잡아낼 정도였는데 그분 지적이 다 맞더군요. 감사하고 또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황 씨에게 교정을 의뢰하는 출판사도 있다. 황 씨가 ‘최종 오케이’ 해야 마음 놓고 인쇄에 들어가는 출판사도 적지 않다.

영어 공부는 열심히 하면서 우리말 공부는 소홀히 하는 사람이 많다. 황 씨는 서 대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 나라에서 제대로 된 국어사전을 하나씩 선물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기분 좋은 아이디어다. 하지만 나라가 하지 않는다면 부모들이 해야 한다. 아니, 부모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한글날을 앞두고 황 씨가 생각났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절대로 기사 쓰지 말라”고 펄쩍 뛰신다. 서 대표의 말 대로 참 고맙고 매력적인 황 씨 할아버지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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