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오동진]영화 망치는 영화 프로그램

  • 입력 2007년 8월 4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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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반전이 인상적이었던 영화 ‘식스 센스’가 영국에서 상영됐을 때 극장 앞 걸인들이 한몫 단단히 챙겼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매표소 앞에 줄을 선 사람들에게 다가가 말 한마디만 하면 동전 한두 푼은 물론 지폐까지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진짜 유령이 누군지 얘기해 드릴까요?”

요즘 극장가에는 이런 식으로 돈을 얻을 수 있을 법한 영화가 수두룩하다. 여름은 공포영화의 계절. 마지막 반전의 내용이나 귀신의 정체는 영화의 핵심이다. 하지만 ‘식스 센스’ 때와 달리 지금 한국에서는 별 재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이런 내용을 써 놓은 블로그나 댓글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악취미인지, 의도적으로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spoiler·영화나 TV 드라마의 주요 정보를 누설해 재미를 반감시키는 것)를 습관적으로 만드는 사람도 많다.

나는 스포일러 문제가 궁극적으로 비평문화의 부재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이제 대부분의 저널이 영화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의미 있는 콘텐츠로 다루지 않는다. 영화는 그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또 누구나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대중성 추구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지나친 하향평준화 경향은 우려할 만하다.

영화를 진지하고 의미 있는 텍스트로 분석하는 글이나 방송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비평 주간지는 고사 직전이고 영화 주간지의 상당수가 패션잡지로 전락했다. 영화 관련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평론가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프로그램 진행은 물론 영화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각종 코너도 말주변 좋은 연예인이 담당한다. 프로그램을 가능하면 재미있게 만드는 가벼운 어휘가 난무한다. 영화는 즐기는 것이지, 분석하거나 사유하거나 비평하는 대상이 아닌 게 되어 버렸다. 그런 문제 제기를 하면 무슨 공룡시대 화석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상황이므로 오로지 요구되는 것은 영화에 대한 ‘정보’뿐이다. 더 많은 정보, 더 구체적인 정보, 남보다 더 알려주고 더 드러내는 정보.

이렇게 되다 보니 영화 프로그램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결국 줄거리를 몽땅 보여 주는 것밖에 없다. 공중파 방송의 영화 프로그램은 하나같이 해당 영화사에 필름 전편이 담긴 방송용 테이프를 요구한다. 영화에 대한 분석이고 뭐고, 영화를 통째로 보여 줘야 시청률을 높일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영화사가 어떤 프로그램에 방송 테이프를 먼저 줬느냐를 두고 갈등이 빚어진다. 세상에 그런 코미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심하다. 영화의 흥행을 누가 더 확실하게 망칠 수 있느냐를 놓고 치고받고 싸우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스포일러 문제는 이렇게 영화를 그저 하찮은 상품으로 취급하는 풍토에서 빚어진 촌극이다.

미국 NBC의 ‘릴 토크(reel talk)’라는 영화 전문 프로그램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의 평론가가 진행을 맡는다. 미국의 대표적인 노장 영화평론가인 로저 에버트도 TV 영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65세의 나이에 아랑곳없이 시카고 선타임스에 글도 꾸준히 쓰고 있다. 뉴욕타임스 A O 스콧의 영화평론은 길고 난해하지만 언제나 비영어권 나라 독자들의 관심을 모은다. 뉴스위크지 데이비드 얀센의 글이라면 무조건 읽는 사람도 많다.

이들이 쓴 글이나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에는 스포일러가 없다. 스포일러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치밀한 분석과 비평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저널리즘은 영화와 세상을 의미 있게 이어주는 구실을 한다.

스포일러가 걱정되는가. 영화 저널리즘을 먼저 걱정할 때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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