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천금이 꿈속이라 푼돈냥에 許身할까

  • 입력 2007년 7월 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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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생이다/정병설 지음/392쪽·1만5000원·문학동네

‘남녀의 결혼에는 집안 지체 중요한데/순사또 가마 타고 서울로 돌아가니/운명의 정(定)함인가 월하노인(月下老人) 지시런가/갑자기 부귀하면 상서롭지 않다더니 무슨 복이 이러하리/이는 모두 기생으로 세상 나온 내 자신의 잘못이라’

그는 일곱 살에 기생이 되었고 겨우 열두 살에 남자와 처음 잠자리를 가졌다. 당시를 떠올리면 ‘어디 당한 예절인지 짐승과 일반이라’라고 치를 떤다. 그는 열다섯 살에 해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생이 되지만 손님이 몰려와도 ‘천금이 꿈속이라 푼돈냥에 허신(許身)할까’라며 단호하게 돌아선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그는 몸만 탐내는 속물이 아니라 마음을 사로잡는 남자를 만나기를 꿈꾼다. 19세기 조선 기녀들의 가사 문집인 ‘소수록’ 제1편의 주인공 해주 기생 ‘명선’의 이야기다.

‘소수록’은 정병설 서울대 교수가 2001년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실에서 찾아내 일반에 공개한 것이다. 125쪽의 한 권짜리 한글 필사본으로 14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작가는 해주 기생 명선, 종순, 청주 기생 등. 가사(歌辭)와 시조, 토론문, 편지글 등 장르도 다양하다. 기생에 대한 기록은 없었던 게 아니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이만치 드러난 것은 드문 일이라 의미가 컸다.

‘나는 기생이다’는 정 교수가 ‘소수록’의 전 작품과 서울대 규장각, 고려대 도서관과 개인이 소장한 기생 관련 작품을 정리하고 해설한 것이다. ‘거안제미(擧案齊眉)하여 지아비를 섬겨야 할’ 여자가 여러 남자를 상대하는 기생이 되어 겪는 서러움과 고단함을 생생한 육성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다.

가사집 ‘별교사’에서 ‘군산월애원가’의 주인공 군산월의 비극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함경 명천으로 유배 온 홍문관 교리 김진형과 장래를 약속했지만, 김진형이 방면돼 함께 서울로 가던 길에 고향으로 가라는 말을 듣는다. 스무 날이나 함께 여행했는데 느닷없이 더는 함께 못 가겠다니, 군산월에겐 하늘이 노래지는 일이다. “선비의 졸한 몸이/곱고 고운 너의 자색 아름다운 너의 얼굴/사랑하기 부끄럽고 이별하기 야속하다/박절하고 섭섭하나 무사히 돌아가서/간절한 너의 심장 부디 상케 마라”(김진형) “(…) 눈물이 흘러내려 반 잔 술이 한 잔 되고/한 잔 술이 넘쳤구나”(군산월) 사랑했던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차가운 배신의 말에, 무너져 내렸을 군산월의 가슴이 절로 헤아려진다.

저자의 말대로 기생은 존재 자체가 모순이다. “천인이면서도 우아함을 뽐내고, 하층이지만 높은 교양수준과 예술성을 자랑한다. 누구나 꺾을 수 있는 꽃이지만, 아무나 가까이 할 수 없는 자기 영역이 있었다.” 또 조선 사회의 모순을 대표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욕망의 절제를 강조한 유교 사회에서 사라지기는커녕 번성한 욕망의 상징이었다.

‘소수록’에는 늙은 기생이 늙음을 한탄하는 ‘탄로가(嘆老歌)’, 해주 감영이 기생을 점고(點考)할 때 불렀던 ‘점고호명기’ 등 다양한 작품이 실려 있다. 돈이 최고라고 거침없이 말하기도 하고, 큰 원한 작은 원한 할 것 없이 마음에 상처가 나면 모조리 갚으리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그 행간에는 “나는 기생이다”라는 외침이 들어 있다. 그 뜻은, 남자들은 해어화(解語花·말하는 꽃)라고 불렀지만, 실은 “나는 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절박한 부르짖음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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